데우스엑스마키나…그랑블루…카르페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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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우스엑스마키나…그랑블루…카르페디엠
  • 정연일 여행가
  • 승인 2023.09.08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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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14배 시칠리아, 최소한 보름 일정으로 찾아가길

정연일의 지중해 섬기행-17

튀르키예, 그리스, 이탈리아 등 지중해 일대의 고대 그리스 로마 극장에 가보면 무대 중앙에서 손뼉을 치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대부분 현지 투어가이드인데 극장을 찾은 여행자에게 음의 공명이 얼마나 잘 되는지 들려주기 위해서이다. 이런 풍경을 볼 때마다 음향을 뜻하는 단어 어쿠스틱(Acoustic) 은 어원이 그리스어이고, 소리를 뜻하는 단어 사운드(Sound)는 어원이 라틴어라는 사실이 떠오른다.

조석간만 차로 육지와 연결되는 이솔라벨라. 사진=픽사베이
조석간만 차로 육지와 연결되는 이솔라벨라. 사진=픽사베이

고대 그리스 로마의 극장과 공연장에서 유래한 단어 중에서 지금도 일상에서 사용하는 단어가 많다. 연극의 막()이나 영화의 장면을 뜻하는 씬(Scene), 극장에서 합창단이 공연하는 반원형 공간을 뜻하는 오케스트라도 역시 어원은 고대 그리스 극장에서 나왔다.

앰프와 스피커 그리고 마이크가 없던 고대에 지은 고대 그리스 로마 극장의 음향 설계는 매우 훌륭해서 지금도 종종 공연장으로 쓰인다. 20175, 43G7 회의가 타오르미나에서 열렸을 때 타오르미나의 고대 그리스 극장에서 축하 공연이 있었다. 지휘자는 정명훈, G7 정상 앞에서 펼쳐진 한 시간 남짓한 공연의 마지막 연주곡은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간주곡(intermezzo)이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묘사한 17세기 이탈리아 화가 토렐리의 작품.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묘사한 17세기 이탈리아 화가 토렐리의 작품.

영화 대부 시리즈 중에서 마지막 편인 3편의 엔딩 장면인 주인공인 마이클 코를레오네(알 파치노)의 쓸쓸한 죽음에 배경음악으로 흐르던 곡이기도 하다. 유튜브에서 정명훈 타오르미나로 검색하면 당시 공연 실황을 볼 수 있다. 음악도 아름답지만 해 질 무렵의 타오르미나 고대 그리스 극장의 풍경도 정말 아름답다.


연극에서 갈등을 중재하는 신


오케스트라나 씬 외에도 고대 그리스 연극과 극장에서 나온 용어 중에서, 가끔 회자되는 조금 어려운(?) 용어가 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이다. 단순 직역하면 기계에서 나온 신(God)이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 연극이든 현대의 영화나 TV 드라마이든 등장인물의 갈등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다.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는 등장인물의 갈등이 절정을 이룰 때, 그리스 신화의 신이 나타나 갈등을 중재했다.

한국의 1980~90년대 해수욕장처럼 사유화된 이솔라 벨라 해변. 사진=정연일
한국의 1980~90년대 해수욕장처럼 사유화된 이솔라 벨라 해변. 사진=정연일

도르래나 기중기에 연결된 기계적 무대장치를 타고 신이 허공에서 내려왔기에 이를 기계에서 나온 신, 즉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불렀다. 현대의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신 대신 기적이나 행운 또는 우연한 사건으로 갈등의 구조를 해결한다. 한국 TV 드라마의 클리세인 출생의 비밀도 여기에 해당한다.

고대나 현대나 인간의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생로병사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인간이 모이면 반드시 갈등이 생긴다. 갈등은 가족, 친구, 지인 등과의 개인적인 것부터, 회사, 사회, 집단, 민족, 국가 등의 거시적 집단과의 갈등이 있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사멸하기까지 이 모든 갈등을 겪으며 산다.

주세페의 투어 보트. 사진=정연일
주세페의 투어 보트. 사진=정연일

그렇기에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갈등을 해소할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찾거나 기다리는지도 모르겠다. 타오르미나의 고대 그리스 극장에 앉아서 공연을 관람하는 G7 정상이야말로 현대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일 수도 있는데, 오히려 세상의 갈등은 더 커져만 간다. ‘물은 셀프라는 말처럼, 데우스 엑스 마키나도 역시 셀프서비스일까?

괴테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가 영감을 얻으려 찾았고 극찬했던 겨울 휴양지 타오르미나는 이제 사시사철 사람이 많다. 오히려 겨울이 가장 적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여행자와 관광객으로 인파가 가득하다. 특히 크루즈 선이 입항하면 크루즈 선에서 쏟아져 내린 관광객들이 좁은 타오르미나의 보행거리를 가득 메운다.

타오르미나 보행가 양편의 상점은 현지의 토산품이나 기념품을 취급하는 곳보다 크루즈 선에서 하선한 관광객이나 부유한 중동 러시아의 장기체류자를 노린 명품을 취급하는 곳이 점점 더 늘어난다. 산 중턱의 작은 마을에 명품이라니. 오버 투어리즘의 씁쓸한 그늘이다. 4월인데도 이 정도 인파인데 한여름에는 얼마나 많을지.


이솔라 벨라는 아름다운 섬

 

그리스 신화의 외눈박이 거인의 머리를 닮은 사이클롭스 바위. 사진=정연일
그리스 신화의 외눈박이 거인의 머리를 닮은 사이클롭스 바위. 사진=정연일

고대 그리스 극장에서 나와 동편 메시나 게이트를 통해 타오르미나를 빠져 나와 푸니비아(케이블카) 승강장으로 향한다. 산 중턱의 타오르미나에서 바닷가까지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어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이동할 수 있다. 요금도 저렴한 편이다.

구글맵에는 운영 중이라고 나와 있으나 막상 케이블카 승강장에 가보니 문을 닫았다. 시칠리아에서는 이런 곳이 많으니, 구글맵을 100% 믿으면 안된다. 승강장 맞은 편에 바다로 내려가는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다. 시간표에 나와 있는 버스는 역시 오지 않는다. 시칠리아에서는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한참을 기다리니 버스 한 대가 온다. 알 마레(Al mare)? 바다로 가냐 물으니 씨(Si)! 그렇다고. 사람을 가득 태운 버스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그재그로 내려간다. 한참을 내려가 도착한 종점이 이솔라 벨라(Isola bella)이다.

이솔라 벨라는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이다. 이솔라(Isola)이고 벨라(Bella)아름다운이라는 뜻이다. 마돈나의 노래 중에서 라 이슬라 보니따(La isla bonita)와 같은 뜻이다. 이솔라 벨라는 이탈리아어이고 이슬라 보니따는 스페인어이다. 한자로는 미도(美島)이다.

코끼리 형상의 침식 바위,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인어 세이렌이 쉬던 곳이라고. 사진=정연일
코끼리 형상의 침식 바위,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인어 세이렌이 쉬던 곳이라고. 사진=정연일

이탈리아에는 시칠리아뿐만 아니라 북부 알프스 산악지대의 마조레 호수에도 이솔라 벨라라는 섬이 있다. 사실 시칠리아 타오르미나 해안의 이솔라 벨라보다 마조레호수의 이솔라 벨라가 더 유명하다. 그 일대를 다스렸던 보르메오 가문의 궁전이 이솔라 벨라에 있기 때문이다. 시칠리아 타오르미나의 이솔라 벨라가 유명한 이유라면, 바다와 해안의 풍경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한국의 제부도처럼 조석 간만 차이에 의해 섬으로 가는 길이 열려 걸어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솔라 벨라가 있는 해변은 한국의 동해안처럼 일자로 길게 뻗은 해안이 아니라 W자 모양이 겹쳐진 해안이라 지형적으로 해변과 해변 사이를 도보로 건너기가 쉽지 않다. 거기에 해변을 사유화한 업소들로 인해,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앉아서 쉴 곳이 없다. 마치 한국의 1980~1990년대 해수욕장에 설치된 파라솔을 보는 듯하다. 시칠리아에서는 아직도 이런 일이 가능하다.

이솔라 벨라 해변에서 카타니아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는 타오르미나 기차역까지는 꽤 먼 거리다. 구글맵으로 확인해보니 도로 양편으로 인도도 따로 없어 조금 위험해 보이기도 하다.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시칠리아의 뜨거운 태양에 그을린 초로의 이탈리아 사내가 다가와서 안내서를 보여주면서 보트 투어를 권한다. 안내서를 보니 한 시간 정도 보트를 타고 해안을 따라 여섯 곳의 장소를 방문하는 프로그램이다.

보트 한대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푸른 동굴. 사진=정연일
보트 한대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푸른 동굴. 사진=정연일

기암괴석이야 전 세계 어느 바다에서나 볼 수 있지만, 영화 그랑블루의 촬영지라는 문구에 끌렸다. 90년대 대한민국의 카페와 술집에 걸려있던 영화 포스터 중 단골이었던 뤽 베송의 영화 그랑블루의 일부 장면을 타오르미나와 이솔라 벨라 주변의 바다에서 찍었다.

그럼 보트투어 마치는 지점을 출발 원점이 아니라 타오르미나 기차역 근처로 해줄 수 있냐고 흥정을 하니 흔쾌히 승낙한다. 보트가 그리 크지 않아. 15명 일행이 모두 타니 배 안이 꽉 찼다. 조금이라도 흐리거나 바람이 분다면 투어 진행 시 안전을 위해서 작은 보트는 가급적 피한다.

날씨가 아주 맑고 바람이 없어 바다가 잔잔했다. 초로의 선장은 이름을 물으니 주세페라고 대답한다. 한국의 철수처럼 이탈리아에서 흔한 이름이다. 보트가 바다로 나가자 주세페는 음악을 틀었다. 남부 이탈리아 민요부터 영화 대부의 주제가까지 풍경과 잘 어울리는 음악이었다.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사람들이 그렇듯 주세페도 잠시도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한다. 장소를 안내하는 목소리가 노래처럼 리드미컬하고 목소리는 고조되어 있다. 우울이라고는 단 1%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다. 거기에 남부 이탈리아 사람 특유의 유머가 녹아 들어있다.


배를 타야 느끼는 그랑블루

 

대부 3과 그랑블루에 배경으로 나왔던 타오르미나 기차역. 사진=윤태옥
대부 3과 그랑블루에 배경으로 나왔던 타오르미나 기차역. 사진=윤태옥

해안은 육지에서 보는 풍경과 배를 타고 바다에서 보는 풍경이 매우 다르다. 바다에서 보는 풍경이 오히려 더 멋지다라는 것을 세계 곳곳에서 배를 타며 깨달았다. 흔히 세계 3대 미항이라고 하는 나폴리 항도, 한국의 부산 항도 바다에서 배를 타고 봐야 참모습을 느낄 수 있다.

주세페는 해안의 기암괴석이 있는 곳으로 보트를 몰았다. 침식과 풍화로 어떤 곳은 코끼리처럼 보이고, 어떤 곳은 그리스 신화의 외눈박이 거인(사이클롭스)처럼 보인다. 압권은 해안절벽의 침식 동굴. 보트 하나가 들어갈 수 있는 크기 정도의 동굴이 몇 개 있고, 그 속에 들어가면 동굴 입구로 들어온 빛으로 인해 바닷물 색이 아주 독특한 푸른 빛을 띤다. 나폴리 앞 카프리섬의 푸른 동굴과 같은 원리이다. 말 그대로 그랑블루(Grand Blue)이다. 배를 타지 않았으면 보지 못했을 풍경이다.

주세페는 타오르미나 기차역 가까운 해변에 우리를 내려다 주고, 유쾌한 콧노래를 부르며 보트를 몰고 사라진다. 오늘 하루 벌이는 다 했으니 집으로 돌아 갈 거라고. 샤워하고 화이트와인을 마실 거라고. 재물에 큰 욕심을 내지 않는 오늘을 사는 시칠리아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카타니아행 기차를 타기 위해 들어선 타오르미나 기차역 내부가 왠지 눈에 익다. 영화 그랑블루와 대부3에서 등장했던 곳이다. 카타니아행 기차는 40여 분을 달려 종점인 카타니아 중앙역에 도착했다. 시칠리아 여행의 끝이다.

제주도의 14배 크기라 열흘 넘게 부지런히 다녔지만, 그래도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있다. 개별 자유여행으로 시칠리아 여행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보름은 잡으라고 추천하고 싶다. 시칠리아는 그만한 시간을 보낼 가치가 있는 곳이다. 단 여름은 피할 것. 4월 말 5월 초가 가장 좋다.

*지금까지 지중해 섬 기행-시칠리아 여행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호부터는 몰타 기행을 연재합니다.

●정연일

인생의 첫 사표를 던지고 인도로 떠난 1997년부터 현재까지 취미도 특기도 생업도 여행인 사람. 세계 100여 개국 이상을 여행했다. 유럽에서 가장 사랑하는 지역은 지중해 연안 국가.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제목에서 따온 닉네임 라스트라다 La Strada는 이탈리아어로 ‘길’이라는 뜻이다. ‘라정’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그는 9월 13일 아프리카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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