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이푼江 뿌려진 고혼 돌아와 깃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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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푼江 뿌려진 고혼 돌아와 깃드소서
  • 박익규 전문기자
  • 승인 2023.09.22 08: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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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 선생 기념관…2023년 10월, 추진 10년 만에 준공
사업 주체 변경, 자부담사업비 마련 등 천신만고 끝 결실
건립 주역 송기섭 진천군수‧장주식 진천문화원장 인터뷰
이상설 기념관은 선생의 선구자적 독립운동 위상에 걸맞게 우리 전통건축 양식의 최고봉인 주심포 양식을 도입했다.
이상설 기념관은 선생의 선구자적 독립운동 위상에 걸맞게 우리 전통건축 양식의 최고봉인 주심포 양식을 도입했다.

보재 이상설 선생 기념관이 202310월 준공된다. 10년 전인 201312월 숭모사업 기본계획이 수립되고 2015년 국가현충시설 건립대상사업으로 선정된 지 8년여 만이다.

노도탁랑(怒濤濁浪)의 망국을 살리기 위해 온갖 고초를 겪으신 이상설 선생의 삶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기념관 건립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무수히 많은 역경과 시련을 극복하고 기념관을 준공하게 된 것도 선생의 보우(保佑)하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상설 기념관은 선생의 선구자적 독립운동 위상에 걸맞게 우리 전통건축 양식의 최고봉인 주심포 양식을 도입했다. 특히 전시관은 전통건축을 현대건축 재료와 공법으로 재해석하여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선생께서 신구학문을 대집성(大集成)하고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독립운동을 실천하신 것을 본받아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건축물을 건립해 건축학 성지로도 자리매김하리란 기대다.

보재 이상설 기념관 건립의 주역인 송기섭 진천군수와 장주식 진천문화원장을 인터뷰했다.


나라 위해 헌신한, 존경심의 발로에서 추진

- 송기섭 진천군수

 

보재 이상설 기념관 건립의 배경은 무엇인가

= 진천 출신인 보재 이상설 선생은 조선의 대학자이자 조국 독립을 위해 초석을 닦은 독립운동의 선구자다.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선생이 잊히고만 있어 그를 기리고 추모하는 기념관 건립은 꼭 필요한 사업이었다. 그런데도 민간단체가 사업 주체가 되다 보니 계속 표류하고 있어 급기야 사업 주체를 변경, 강력히 추진하게 되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존경심의 발로
에서 기념관을 꼭 완성하고자 했다.


건립을 통해 선생의 어떠한 면을 부각할 계획인가

= 기념관은 선생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와 단편적 정보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기념비적 장소이다. 아울러 선생의 학문에 대한 천재성과 조선시대 관료로서 구국운동에 앞장선 모습, 해외로 망명하여 조국 독립을 위해 민족학교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헤이그 사행 이후 나선 구미 순방길과 성명회, 13도의군, 권업회 조직, 북간도 최초의 독립운동기지 한흥동 건설, 대한광복군정부 수립과 같이 해외 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한 선생의 업적을 재조명할 계획이다. 이처럼 선생께서 다양한 분야에서 펼친 항일독립운동을 소개하고 그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연출하고자 했다.


기념관이 갖춘 건축 분야의 독특한 특징은 무엇인가

= 기념관은 고려시대 전통 주심포 양식과 현대 철근콘크리트 구조와 융복합된 전통 건축이 연결되어 있다. 1000년의 역사를 두 개의 건축양식이 연결한 모습을 뚜렷이 볼 수 있는 국내 유일의 기념관이다. 최고높이가 13m, 처마길이 최대 5m 등 주심포 양식 건축물 중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수덕사 대웅전을 본떠 설계한 주심포 양식과 맞배지붕의 절제미, 배흘림기둥의 유려한 곡선 등 고려시대 전통건축과 현대건축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건축학의 성지이다.


건립과정에 겪은 어려움 중 하나를 꼽는다면

= 201510, 국가현충시설 건립대상사업으로 선정되고 8년이 지났다. 민간단체인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가 나서 진행하였으나 자부담 확보 등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다. 2020년 사업주체를 진천문화원으로 변경하여 진천군과 함께 추진하면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숭모사업 기본계획부터 12년의 어렵고 힘들었던 세월이 마치 이상설 선생이 망명 후 순국하시기까지 12년과 일치하는 것 같다. 선생께 죄송스러운 마음이다.


어려웠던 만큼 더 보람을 느끼신 일은 무엇인가

= 기념관 건립비용의 20%를 자부담해야 하는 만큼 군민들께서 정성을 모아주셨다. 20173월부터 20206월까지 전 군민 11구좌 갖기 운동을 전개한 결과 169972367원의 성금을 모았다. 상산초등학교 어린이들부터 진천관내 300여 개 경로당 어르신들까지 한마음 한뜻으로 기탁해 주셨다. 기관, 사회단체, 기업체, 후손 및 문중 등 전 군민이 나서 이상설 선생 기념관 건립에 적극 동참해주셨다. 이 기회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유물 및 자료 수집에 어려움이 있다고 하는데

= 선생께선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유훈을 남기셨다고 한다. 이에 선생의 유해는 수이푼강에 뿌려졌고 유품과 관련 기록이 모두 소각되어 수집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전국의 지자체와 기념관, 유관기관, 경주이씨 중앙화수회,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 등 관계자 등을 만나 현재 69점의 유물을 확보했다. 앞으로도 다각적으로, 지속적으로 노력할 계획이다.


앞으로 기념관 운영계획과 과제는

= 기념관이 준공되어 선생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애국애족정신과 구국정신을 현창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첫 단추가 완성된 셈이다. 기념관 준공이 선양사업의 끝이 돼서는 안 된다.

지속적으로 선생의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널리 알리고, 유훈을 받들어 선생의 독립, 애국애족정신을 계승하겠다. 선생의 건국훈장을 승격시키고, 숭렬사 초입의 진천유치원을 활용하는 방안을 충북도교육청과 협의하겠다. 이후 서전서숙을 기리는 탑을 설치하고, 중기적으로 추모광장 조성 등 수학캠프를 비롯한 여러 가지 숭모행사를 숭렬사를 중심으로 진행해 진천을 역사교육의 특화도시로 발전시키겠다.


선생의 양손자라는 사명으로 완성한 기념관

- 장주식 진천문화원장

 

두 번이나 사직 의사를 밝혔지만, 되레 설득당했어요. 힘들 때마다 이상설 선생이 친할아버지다, 내가 선생의 양손자라는 마음으로 기념관 건립에 임했어요

장주식 진천문화원장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이정표를 제시한 최고 독립운동가의 위상에 걸맞은 최고의 기념관을 건립하고자 하는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대학 시절 건축을 전공하고 건설 현장 근무 경험도 있었지만, 전통 목조건축은 생소한 데다 더더욱 문화재 분야는 전혀 달랐다. 전문 서적을 사서 보고 현장의 감리에게 물어가며 공부하는 자세로 공사를 지휘했다.

2013년 생거진천 포럼에서 2017년 선생의 순국 100주년을 앞두고 처음으로 이상설 기념관 건립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201510, 현재의 국가보훈부로부터 국가현충시설 건립대상사업으로 선정되며 마침내 닻을 올렸다. 기념관 건립의 주체인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도 국내 저명인사를 망라해 꾸려졌다.

총사업비 877000만 원 중 자부담분 20%(175000만 원)의 모금은 구성원의 명망에 미뤄 무난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재단법인까지 만들어 노력했으나 이내 성금 모금에 한계가 왔다.

진천문화원이 이상설 기념관 건립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것은 201710월부터이다. 지역 인사들과 함께 이상설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 룽징을 방문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선생의 외롭고 위대한 여정을 알고 나니 한없이 송구스럽고 그동안의 무지가 부끄러웠다. 진천의 후대로서 기념관 건립에 보태고자 진천군민 11계좌 운동을 추진하기로 했다. 장 원장은 17개 기관단체로 구성된 성금모금회 협의회장을 기꺼이 맡았다. 6개월 만에 1억 원을 모았다.

진천군 노인회 경로당 300여 곳에서 1만 원씩을 꺼내 300만 원을 제일 먼저 기탁해 주셨다. 진천 상산초 어린이들이 코 묻은 성금을 모으고, 진천문화원 이사들도 100만 원을 기탁해 주셨다. 이게 도화선이 되어 진천군민, 기관, 단체, 공직자들이 발벗고 나서 17000만 원을 모금했다.

그러나 175000만 원에 이르는 자부담분 미확보로 사업은 한 치 앞으로도 나가지 못하고 답보를 거듭했다. 기념사업회는 애초 사업기간을 연장해가며 자부담 확보에 안간힘을 기울였으나 끝내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20205월 보조사업자가 진천문화원으로 변경승인되면서 장 원장은 운명적으로 기념관 건립의 전면에 서게 된다. 기념관 건립에 당연히 일조는 하겠지만 자신이 책임자가 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공사기간 내내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사업자가 문화원으로 변경된 후 첫 삽을 뜨기까지 약 10개월의 기간이 가장 힘들었다. 나름대로 고생한 서울의 기념사업회로부터 업무를 인계받긴 했지만, 그 과정 또한 결코 순탄치는 않았다. 난항을 겪다보니 무려 4차례의 설계변경이 불가피했다.

고비 때마다 장 원장은 공사 핵심 관계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모든 문제를 투명하고 공정하게 해결했다. 모두의 의견이 모아지다 보니 다소 계획은 더딜지라도 공정은 신속하게 추진할 수 있었다.

구부섭 사무국장의 노고가 컸다. 별도의 사무실과 직원 인건비를 아끼는 것이 성금을 낸 분들에 대한 예의로 생각하고 따로 조직을 꾸리지 않았다. 여타 시군보다 문화원 고유 업무의 양도 많은데다 수년을 표류해온 기념관 건립까지 맡다 보니 몸이 두 동강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장 원장과 구 국장은 재료구매 단계부터 꼼꼼히 해나갔다. 철근을 준비하기 위해 현대제철을 방문하고 강릉 목재공장, 경기도 파주 등 전국을 돌았다. 목재 함수율을 직접 측정하고 FRC(섬유보강콘크리트, fiber reinforced concrete) 서까래 등 국내 최고의 전통가옥 재료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장 원장은 철근, 레미콘 파동 당시 다른 어떠한 현장보다 차질없이 납품해준 송기호 금성개발 회장에게 감사드린다고 했다.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장 원장은 충북도의원 시절은 물론 진천지역에서도 온화하고 합리적인 성품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기념관 건립과정에선 참 많이 싸웠다고 한다.

일요일 휴무, 퇴근 시간부터 모든 공정마다 목수, 편수는 물론 시공업체와 많이 다퉜다. 와중에 당신이 감독관이냐는 욕설을 먹기도 했다. 그런 장 원장이지만 준공을 앞둔 지금은 전국의 12~13개 전통문화재 건축 업체 중 지금의 시공, 감리 업체가 전국 최고라고 자랑을 아끼지 않는다.

장 원장은 사명감이죠. 내 집 짓는 것보다도 더 부담이 컸어요. 주요 공정이 있을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가게 되더군요라며 우여곡절이야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모두가 각자의 역할에서 최선을 다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입니다라고 했다.

지난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장 원장은 이상설 기념관 건립 유공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밤낮없이 기념관 건립에 매진한 장 원장은 주민과 공직자, 직원들에게 공을 돌렸다.

기념관 건립을 하늘에서 지켜보는 이상설 선생의 마음은 어떨까요?”라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아마 선생이 눈물을 흘려 개관식 날에는 이슬비가 내리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는 장 원장의 눈가도 젖어 있었다.

●박익규

음성에서 태어나 청주에서 살아온 충북 토박이다. 중부매일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문화교육체육팀에서 20여 년간 기자, 부국장으로 일했다. 충북도지사 연설기록담당관, 충북인재양성재단 사무국장으로 6년 재임했다. 자신의 삶과 사회 발전을 두루 고민하며 조화롭게 제2의 인생을 사는 중장년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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