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북방의 맛, 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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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북방의 맛, 명태
  •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고고학자
  • 승인 2023.09.29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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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K-피쉬…지구 온난화로 우리 곁에서 사라져

강인욱의 이야기 고고학

한국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명태는 너무나 역설적이다. 가장 좋아하지만 정작 우리 곁에는 없고 우리가 명태에 대해서 아는 것은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 최근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장안의 화제가 되는 조기 명태 멸치라는 특별전을 보고 왔다. 아기자기한 재미 속에서도 정작 명태에 대한 컨텐츠는 많지 않았다. 때로는 신비하기까지 한 우리 삶 속의 명태는 마치 우리와 이어져있지만 정작 가볼 수 없는 북방의 땅과도 같다.

눈을 맞아가며 얼었다가 녹았다가 마른 명태는 황태가 된다.
눈을 맞아가며 얼었다가 녹았다가 마른 명태는 황태가 된다.

실향민의 소울푸드 명태


같은 명태요리도 그 조리 방법에 따라 맛이 가지각색이다. 알찌개, 고지찌개, 대가리만을 재료로 하는 된장찌개, 명란젓, 창란젓 그밖에 구운 명태, 그것을 쪄먹는 맛, 자반 맛 그것은 향수와 더불어 끈덕진 것이기도 했다.” (안수길, 1970 동태찌개의 맛)

한국인에게 간도와 만주의 기억은 참 각별하니, 그 기억을 소설로 녹여낸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안수길(1911~1977)이다. 실제로 간도에서 오랜 기간 살았던 실향민이었던 안수길은 자신의 경험을 녹여낸 <북간도>라는 장편소설로 유명하다. <북간도> 이외에도 안수길은 만주와 연변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한 여러 단편들도 많다. 특히 나는 그의 수많은 단편 중에는 한국전쟁 직후 소시민의 삶이 소소하게 녹아있는 <동태찌개의 맛(1970년 발표)>이라라는 소설을 좋아한다. 어머니와 함께 남하한 실향민인 주인공이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값싸게 즐겨 먹는 동태찌개를 둘러싼 이야기가 주 내용이다.

당시 명태 떼를 따라가다가 그만 북방한계선을 넘어서 납북되는 배들이 늘어나면서 서울 시내에 명태가 품귀현상이 난 것이 소설의 모티브였다. 김훈, 채만식 등 여러 문학가가 명태를 주제로 글을 썼지만, 특히 안수길의 소설이 인상 깊은 이유는 1960년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당시 동태찌개 식당은 으레 또순이(지금은 일 잘하는 야무진 여성을 의미하지만, 원래는 함경도 출신의 여자라는 뜻)들이 했고, 실향민들에게 명태요리는 혀 속에 각인된 고향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기도 했다. 안수길의 소설에 묘사된 소시민들이 하루하루 살면서 저녁에 동태찌개에 소주 한잔을 하면서 피로를 푸는 모습을 보노라면 50년의 세월을 넘어서 독자들의 군침과 얼큰한 찌개에 소주 한잔을 떠올리게 한다.

반건조한 명태는 코다리라고 부른다. 찢은 코다리는 비빔국수나 비빔냉면과 함께 먹는다.
반건조한 명태는 코다리라고 부른다. 찢은 코다리는 비빔국수나 비빔냉면과 함께 먹는다.

원래 실향민들의 잃어버린 북방의 맛 명태는 한국 전쟁을 거쳐서 한국 사람 모두의 음식이 되었다. 한국전쟁 전까지는 동태는 동해안에 살던 사람들의 토속음식이었다. 하지만 전쟁 직후 남한 전역에 퍼졌고, 또 연해주를 거쳐서 중앙아시아로 퍼져간 고려인 디아스포라를 따라서 유라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한국과 유라시아를 잇는 대표적인 음식이 된 셈이다.


연어를 먹은 시베리아 원주민


명태가 인류의 식탁에 올라온 것은 순전히 한국인들 덕분이다. 조선 후기 명천의 태씨 어부가 잡아서 명태가 되었다는 말이 전해지지만, 그 진위는 정확하지 않다고 한다. 분명한 점은 명태 어업의 전통은 조선 후기가 되어서야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17세기가 되어서야 명태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고 19세기가 되어서야 북어, 동태와 같은 다양한 이름도 나오기 시작한다.

아직 놀라긴 이르다. 한국 사람들이 먹기 전까지는 본격적으로 명태를 잡아먹는 사람들이 없었다. 지금도 알래스카 바다에서 1년에 300t 이상 잡히는 최고의 어획고를 자랑하는 생선이건만, 정작 그 사람들은 그 존재를 몰랐다.

한국인들은 날이 추워지면 뜨끈한 동태찌개를 떠올린다.
한국인들은 날이 추워지면 뜨끈한 동태찌개를 떠올린다.

여러 고고학 자료를 뒤져보아도 명태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고고학자들은 과거 사람들이 먹었던 생선의 흔적을 바닷가에 쌓아놓은 조개무지(패총)에 남은 생선뼈의 흔적으로 추정한다. 동해안에도 북한의 함경북도와 연해주 일대의 바닷가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살던 사람들이 남겨놓은 조개무지가 많이 발견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무리 조사해도 동해안의 조개무지에서 명태뼈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약간 범위를 넓게 잡아서 대구계통의 물고기(명태도 대구과의 물고기이다)로 넓혔다. 생선뼈의 흔적만으로 조사해야 하니 혹시 대구와 명태를 혼동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연해주에서 3000년 전의 조개무지에서 발견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엄청난 어획량을 자랑하는 명태를 감안한다면 사실상 명태는 연해주와 시베리아에서 살던 사람들에게 미지의 생선이었음이 분명하다.

연어를 잡는 시베리아 원주민.
연어를 잡는 시베리아 원주민.

어쩌면 동해안의 바다에 지천으로 다니는 명태를 이렇게 몰랐을까. 명태가 미지의 생선이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는 심해에 살다가 겨울에 근해로 밀려오는 명태의 속성 때문이다. 겨울의 연해주의 바닷가는 꽁꽁 얼고 영하 40도는 우습게 내려간다. 이렇게 추운 겨울에 이 지역의 원주민들은 산속에서 모피동물을 잡을 뿐 생산활동은 거의 할 수 없다.

두 번째 이유는 굳이 명태를 잡을 필요도 없이 어족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한국 강원도에서 동해안을 따라 함경도, 러시아 연해주, 사할린과 캄차카 반도로 이어지는 동해안의 강과 하천은 여름~초가을에 바다에서 돌아와 회유하는 연어들로 그득하다. 한국에서는 연어로만 불리지만 사실 그 크기는 어른의 팔뚝보다 큰 것에서 고등어만 한 것까지 다양하다.

8월 말~9월 초에 알을 품어 몸의 반은 붉은색을 띠는 연어들이 하천 곳곳에 알을 까는 장관을 흔히 볼 수 있다. 바다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온 알을 품은 연어는 힘이 빠져서 퍼덕대니 잡는 데는 큰 기술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오는 셈이다.

철갑상어를 잡은 나나이족.
철갑상어를 잡은 나나이족.

흑룡강과 송화강에서 우리나라 삼국시대부터 살던 말갈의 후예 중에는 아예 연어만을 잡아먹으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나나이족이다. 청나라 때에는 이들을 어피달자(魚皮韃子)’라 불렀으니 물고기껍질로 옷을 만들어 입는 오랑캐라는 뜻이다.

나나이족들은 연어가 몰려오면 1주일 정도 되는 짧은 기간에 1인당 300마리 이상의 생선을 잡았다고 한다. 잡는 족족 훈제를 하고 짜낸 알을 말려서 겨울의 식량으로 삼았다. 상황이 이럴진대 추운 바다에서 굳이 목숨을 걸어가며 동태를 잡을 일이 없다.


케이 피쉬, 한국인만의 생선


요즘 한국만의 문화에 K-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 유행한다. 만약 생선에도 그런 한국만의 타이틀을 붙인다면 나는 주저 없이 명태를 떠올릴 것 같다. 한국인이 잡고 먹기 시작한 생선이라는 뜻이 아니 물론, 서해안의 조기같은 생선도 있지만 명태는 특별하다. 명태잡이를 했다는 것은 추운 동해안의 겨울에 집에 있지 않고 밖으로 나가서 생선을 찾아야 할 정도로 고된 삶에 내몰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국인의 독특한 요리 솜씨도 결합이 되었다. 명태는 20세기 이후 근대어업이 도입되어도 여전히 천대받는 생선이었다. 비린내가 심하고 생선살에 맛이 없기 때문이다. 캄차카 반도에서 생선을 잡는 러시아 어부들 사이에서는 1월달에 어업을 나가면 탄식처럼 읆조리는 말이 있다. “생선은 없고 명태만 있네(рыб нет, один минтай)”

명태는 20세기 이후 근대어업이 도입되어도 여전히 천대받는 생선이었다. 비린내가 심하고 생선살에 맛이 없기 때문이다.
명태는 20세기 이후 근대어업이 도입되어도 여전히 천대받는 생선이었다. 비린내가 심하고 생선살에 맛이 없기 때문이다.

그물만 넣으면 그물망이 터지게 명태가 올라오지만 정작 명태는 선원들조차도 먹지 않았다. 잡은 명태는 대부분 동물 사료나 학교의 급식으로 넘기곤 했다. 유학 시절에도 가끔 맛없는 생선요리가 나오면 이거 왜민타이(명태의 러시아어) 같아!”라며 농담할 정도로 맛없는 요리의 대명사로 통했다.

이 맛없고 냄새나서 인기 없는 생선은 한국인의 솜씨로 셀수 없는 수많은 요리로 탄생했으니, 진정한 한국인의 소울푸드가 아니겠는가.


다시 명태를 기다리며


우리의 식탁에서 명태가 멀어지는 이유는 너무나 복합적이다. 1980년대까지 명태를 좋아하던 우리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무차별하게 남획한 것이 1차원인 이었다. 여기에 정치적으로는 북방지역과 냉각되고 지구의 온난화라는 복병이 결합해 다시 명태 떼를 보는 것은 어려워졌다. 가파른 지구온난화로 명태 서식지는 빠르게 북상하고 있다.

강인욱 교수
강인욱 교수

아무리 동해에 치어를 방류해도 쉽사리 명태가 발견되지 않는 또 다른 이유이다. 최근 급격히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냉각되면서 자칫하면 명태가 우리 식탁에서 멀어지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고 있다. 하지만 날씨가 추워지면 따뜻한 동태찌개에 소주 한의 맛을 기억하는 한 명태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50년 전 소설가 안수길의 바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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