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국어사전, 日사전 베껴 오류투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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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국어사전, 日사전 베껴 오류투성이
  • 이재표 기자
  • 승인 2023.10.09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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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출신 박일환 시인 ‘표준국어대사전’ 비판 잇단 저술
최다에 꽂힌 표제어 늘리기, 불필요한 인명‧잡학만 넘쳐
근무시간은 ‘구속시간’…연대파업은 없고, 대신 ‘동정파업’

577돌 한글날 특집-박일환 시인 인터뷰

청주 출신의 박일환 시인은 표준국어대사전의 오류와 문제점을 지적하는 여러 권의 책을 냈다.
청주 출신의 박일환 시인은 표준국어대사전의 오류와 문제점을 지적하는 여러 권의 책을 냈다.

실례지만 구속시간이 얼마나 되죠?” “동정파업을 하다가 체포돼 두어 달 구속됐던 적은 있지만 보다시피 지금은 자유의 몸이죠.”

두 사람은 제대로 묻고 답한 것일까? ‘구속시간동정파업이라는 두 단어가 생소할 수도 있지만,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대화는 동문서답(東問西答)이다.

찜찜했던 두 단어를 국립국어원이 만든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자. 표준국어대사전은 1991년 설립된 국립국어원이 1992년부터 7년여에 걸쳐 500여 명의 인원과 112억 원을 투입해 만들었다. 그러니 정부가 국책사업으로 편찬한 첫 국어사전이다. 표제어 50여만 단어를 무려 7328쪽에 담아내면서 최대, 최다라고 자랑했던 그 사전이다.

구속시간은 구속 수감된 기간이 아니라 회사에 출근해 퇴근할 때까지 식사시간, 휴게시간을 포함한 근무시간을 일컫는 일본단어다. 이 단어도 우리 국어사전에 있다. 사진=표준국어대사전(웹사전) 갈무리
구속시간은 구속 수감된 기간이 아니라 회사에 출근해 퇴근할 때까지 식사시간, 휴게시간을 포함한 근무시간을 일컫는 일본단어다. 이 단어도 우리 국어사전에 있다. 사진=표준국어대사전(웹사전) 갈무리

먼저 구속시간(拘束時間)의 뜻은 출근해서부터 퇴근할 때까지 휴게시간을 포함한 근로자의 근무시간이다. 구속돼 갇혀있던 기간이 아니라 근무시간의 다른 말일 뿐이다. 이 밖에도 사전에는 근무시간과 관련해 실동시간(實動時間)’, ‘실적시간(實積時間)’, ‘정미시간(正味時間)’ 등의 단어가 실려있다.

이런 단어의 뜻이 궁금하다면 직접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시라. 2008년부터는 종이사전 대신 인터넷 웹사전으로만 발간하고 있으니, 컴퓨터는 물론 스마트폰에서도 사전을 내려받아 손쉽게 검색할 수 있다.

동정파업이라는 생소한 일본단어는 우리 사전에 있어도, 이를 태체할 만한 동조파업, 연대파업은 사전에 없다.
동정파업이라는 생소한 일본단어는 우리 사전에 있어도,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동조파업, 연대파업은 사전에 없다.

구속시간의 의미를 알고 나니 동정파업(同情罷業)에도 뭔가 함정이 있을 것만 같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동정파업의 뜻은 동맹 파업 중인 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하여 다른 직장의 노동자들이 합심하여 일으키는 파업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단어를 종종 썼고, 신문 기사에도 등장한단다.

하지만 동정이라는 말은 가여운 사람에게 시혜를 베푼다는 느낌이 강하다. 노동 현장에서는 이 단어를 쓰지 않는다. 이보다는 동조파업이나 연대파업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 두 단어는 널리 쓰이고 있지만 놀랍게도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두 단어가 없다. 구속시간이나 동정파업은 모두 일본어사전에서 왔다.


잠든 말 깨우려 시작했다


10여 년째 국어사전과 씨름하는 이가 있다. 전직 국어교사인 박일환(62) 시인이다. 고교 시절부터 장래희망이 시인이었던 터라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고, 평생 시를 쓰기 위해 국어교사가 됐다. 박일환 시인은 국어교사라서 사전을 봐야 할 일이 많았고, 잠든 우리말을 깨워서 더 좋은 시를 쓰려고 더 사전을 봤다고 귀띔했다. 제목에 깨우다가 들어간 국어선생님 잠든 우리말을 깨우다(2012), 국어선생님 잠든 사투리를 깨우다(2016)는 그런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책들이다.

그런 그가 사전의 샅바를 잡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의문스러운 뜻풀이를 발견했고, 더듬더듬 그 근원을 찾아보니 엉터리라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더욱이 숱한 오류와 허점이 일본어사전에 기대거나, 아예 베낀 데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끼게 됐다.

그래서 쓰게 된 책이 2015미친 국어사전을 시작으로 국어사전 혼내는 책(2019), 맹랑한 국어사전 탐방기(2020), 국어사전이 품지 못한 말들(2021), 국어사전 독립선언(2022) 등이다.

박일환 시인은 10월 5일, 유튜브 생방송 다독다讀에 출연하기 위해 청주에 왔다. 사진=이재표 기자
박일환 시인은 10월 5일, 유튜브 생방송 다독다讀에 출연하기 위해 청주에 왔다. 사진=이재표 기자

577돌 한글날을 앞둔 105, 청주시 흥덕구 강서동에 있는 와우팟 스튜디오에서 박일환 시인을 만났다. 박 시인은 이날, 와우팟이 유튜브 생방송으로 송출하는 책담방송 다독다독(다독다)’에 출연하기 위해 청주에 왔다. 박 시인은 2023629일 출간한 신간 시집 귀를 접다(청색종이)를 가지고, 진행자 김은숙 시인과 1시간 동안 환담했다.

현장에서 방송을 지켜보는 내내 전직 국어교사이자 시인으로서 국어를 대하는 진심이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드러났다. “어렸을 때 떠났지만 청주가 고향이라는 말도 취재를 결심하는 데 일조했다. 급히 국어사전 독립선언(섬앤섬)을 사서 읽었다. 경기도 부천에 사는 시인과의 인터뷰는 107일 전화로 진행했다.


외래어 순화하자는 책 아냐


국어사전 독립선언은 우리가 알면서도 쓰고 모르면서도 쓰는 외국말이나 외래어 남용을 지적하는 책이 아니다. 우리말에 한자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높고, 특히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가 무분별하게 쓰이니 이를 순화하자는 책도 아니다.

박일환 시인은 책 들어가는 말에서 오히려 외국말이 들어와 우리말에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표현의 폭을 넓히는 장점도 있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예술(藝術), 물리(物理), 계급(階級), 투표(投票), 환경(環境), 객관(客官) 등은 서양 용어를 번역해서 만든 개념어들인데, 일본사람들이 수고해준 덕에 우리가 편하게 쓰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박일환 시인은 왜 그렇게 분노를 느끼고 있는 걸까? 박 시인은 표준국어대사전이 최다 표제어등에 집착한 성과주의의 산물이라며 성과만 생각하다 보니 백과사전이나 일본어사전을 인용하거나 베끼게 됐다고 주장했다.

설명은 조리 있고 차분하다. ‘고지엔(광사원, 廣辭苑)’이나 다이지린(대사림, 大辭林)’ 등 일본어사전의 뜻풀이를 우리 사전과 비교하면서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들이댄다. 오류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 조선왕조실록이나 일제강점기의 우리 신문, 심지어 외국 신문, 문예 서적까지도 인용하고 있다.

박일환 시인은 매일 한두 시간은 국어사전을 들여다본다면서 웬만한 내용은 인터넷을 통해 검색할 수 있고, 외국어 번역도 번역기를 통해서 해결한다고 덧붙였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지식과 열정, 끈기만 가지고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얘기다.


몽롱체, 일본사전에도 없어


일본어사전을 베낀 흔적은 곳곳에 있다. 한 예로 예술용어에 몽롱체(朦朧體)’라는 단어가 있다. 시인은 술에 취해 시를 지었다는 이백이나 술독을 끼고 앉아 그림을 그렸다는 장승업 같은 이들도 있었으니, 몽롱한 상태가 예술창작의 원천으로 작용한 때도 있다는 얘긴 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사전에서 몽롱체는 시문회화에서 명확한 의미나 윤곽 따위를 갖지 않은 것이다. 이는 일본어사전 고지엔의 풀이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다. 다른 일본어사전인 정선판 일본국어대사전은 몽롱체를 메이지 후기에 요코하마 다이칸과 히시다 순쇼가 오가쿠라 덴신의 촉구로 시작한 일본화의 몰선묘법이라고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동양화에서 먼저 선을 그리고 그 안에 채색하는 선묘법(線描法)과 달리 색의 농담으로만 표현하는 이른바 한 붓 그리기기법이다. 우리가 쓴 적도 없고, 앞으로도 사용할 가능성이 없는 몽롱체를 굳이 우리 국어사전에 넣으려 했다면 최소한 일본의 회화 용어라는 부연 설명을 담았어야 한다는 얘기다.

열정(熱情)이 아닌 열정문학(劣情文學)’저속하고 천한 정욕만을 불러일으키는 문학이란다. 비슷한 뜻으로 유탕문학(遊蕩文學)’, ‘육체문학(肉體文學)’도 나온다. 부드러운 연문학(軟文學)’, 딱딱한 경문학(硬文學)’ 같은 분류법도 등장한다. 평생 우리말을 사용하면서 시를 쓰고, 30년 동안 국어를 가르친 시인에게도 낯선 단어 천지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김밥천국, 알바천국도 아니라 보행자천국이 나온다. 우리는 단어로 쓰지 않지만 일본은 공식용어다. 일본사전을 베낀 증거.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김밥천국, 알바천국도 아니라 보행자천국이 나온다. 우리는 단어로 쓰지 않지만 일본은 공식용어다. 일본사전을 베낀 증거.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보행자천국(步行者天國)’이란 단어도 있다. 간선도로의 특정 구간에서 특정 시간 동안 차량 통행을 금지하는 것을 일컫는 일본의 공식용어다. 일본사전을 베낀 코미디 같은 증거다.


국어학자가 만물박사 아냐


표제어를 늘리기 위해 백과사전이나 인명사전에나 들어갈 단어들을 마구 끌어다 넣은 것도 심각한 수준이다. 박일환 시인은 이름이나 지명 같은 것으로 표제어 수를 늘리다 보니 전문용어에 대한 오류가 많다국어학자들이 모든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박 시인은 또 그런 예가 10만 개는 되는 것 같다그만큼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용어는 오히려 제외됐다고 강조했다.

정치용어 중 사회왕제(社會王制)’에 대해서는 국왕의 권력이나 은혜에 의하여 위로부터 사회주의를 실현하려고 하는 이론이라고 한 줄 설명이 나온다. 시인은 국왕과 사회주의가 어떻게 연결된다는 건지 궁금해 독일 사상가 폰 슈타인의 이론까지 공부해야 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독일에 가서 폰 슈타인에게서 들은 뒤 만든 사회왕제 이론은 천황제의 변형일뿐 사회주의와 전혀 관계가 없다. 정작 일본어사전에도 나오지 않고, 일본의 일부 백과사전에만 나오는 죽은 말을 우리나라 국어사전이 살려낸 사례다.

당근의 사례를 보면 더욱 기가 막힌다. 사전에 나오는 당근의 설명은 산형과의 두해살이풀. 높이는 1미터 정도이며, 잎은 뿌리에서 나고 우상복엽이다. 여름에 흰 꽃이 줄기 끝에 복산형 화서로 피고, 원뿔 모양의 불그레한 뿌리는 식용한다이다.

우상(羽狀)새의 깃 모양(羽狀)’, 산형(傘形)우산 모양이라는 것을 공부하고 나서야 입이 좌우로 나란히 달리는 우상복엽과, 층층 꽃이 피는 꽃차례’, 즉 복산형 화서(花序)의 뜻을 이해하게 된다. 국어사전이라기보다는 백과사전의 설명인데 한자어라 어렵다.


문제는 고칠 의지 부족


국립국어원은 이처럼 명백한 오류와 부실을 고치는 데 열의가 없다. 자궁의 잘못된 뜻풀이를 고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사전에 자궁은 여성의 정관 일부가 발달하여 된 것으로 태아가 착상하여 자라는 기관으로 나왔다. 박 시인은 2019년 펴낸 국어사전 혼내는 책에서 여성의 자궁에는 정관이 없다고 지적했다. 수란관을 수정관으로 잘못 인용했고, 다시 정관으로 변형되면서 자궁에 정관이 됐다고 지적했다.

박일환 시인은 책을 내고 신문에도 연재하는 등 끊임없이 문제점을 지적하지만, 웹사전에서 수정하는 경우는 10분의 1정도인 것 같다자궁에 정관이 있다는 설명에 대한 지적은 2017년 홈페이지에도 올라왔지만, 그동안 손을 대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렇게 20여 년 동안 표준국어대사전에만 존재했던 자궁의 정관은 한글날을 며칠 앞두고 중앙일보가 이 사실을 취재하자 수정된 것으로 확인됐다.

박일환 시인은 국립국어원이 표준국어대사전을 전면 개정하는 절차에 들어간 것으로 안다면서도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고치려 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박 시인은 또 공청회 등을 열어서 개정의 기준과 방향을 정하면 좋겠는데 외부에서 참여할 방법은 없는 것 같다면서 안타까워했다.


박일환 시인은

친가외가가 청주라서 종종 내려와요


박일환 시인은 1961년 충북 청주시 서원구 장암동에서 태어났지만 일곱 살 때 청주를 떠났다. 젊은 아버지가 산에 나무하러 다니는 게 너무 싫어서일자리를 찾아 상경했고, 1년 뒤 가족 모두 서울로 이사했다.

박 시인은 친가외가가 모두 청주에 있고, 부모님은 25년 전 고향으로 돌아오셨다지금은 홀로 되신 어머니가 청주 오근장에 계셔 지난 추석 때도 청주에 다녀갔다고 말했다.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80학번인 박 시인은 1987년 졸업 후 사립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됐다. 이후 공립고에 복직돼 근무하다가 2017년 명예퇴직하고 집필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1992년 단편소설로 전태일문학상을 받았으며, 1997내일을 여는 작가로 시인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는 싸움』 『덮지 못한 출석부』 『등 뒤의 시간』 『귀를 접다등이 있으며, 청소년 시집과 국어교육 관련 여러 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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