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자명 독립운동가, 공산주의사상 동의 안해”
상태바
“류자명 독립운동가, 공산주의사상 동의 안해”
  • 김천수 기자
  • 승인 2023.11.16 13: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명섭 교수 ‘의열단과 류자명’ 충주 강연…3국이 인정한 독립운동가
<류자명과 의열단> 김명섭 교수 초청 강연 포스터. 우측 하단이 류자명, 좌측 하단 인물이 김원봉이다.

무정부주의자 항일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류자명(유자명) 선생과 그가 속했던 의열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의 성격에 대한 심도 있는 조명이 전파되고 있다. 류자명은 김원봉을 주축으로 1919년 조직된 의열단의 참모장까지 지냈다. 그러나 충주가 고향인 류자명의 길은 의열단 단장이던 김원봉과는 달랐다.

지난 9일 저녁 충주시 관아 공원 옆에 있는 문화창업재생허브 2층 강당에서 ‘의열단과 류자명’ 제하의 김명섭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교수 초청 강연이 열렸다. 사단법인 류자명선생기념사업회가 주최한 행사다. 이날 강연장에는 류 선생의 손자로 기념사업회 회장인 류인호 씨와 동생 류인상 씨 등 100명 가까운 충주 시민들이 참석해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김명섭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교수

20여 년 동안 류자명 등 항일독립운동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김 교수는 이날 본격적인 강연에 앞서 “이번 행사는 이종찬 광복회장이 참석해야 할 만큼 뜻깊은 자리다”라고 말했다. 그는 “류 선생은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일본이 아나키스트를 테러리스트로 오해하고 악선전을 했다”고 밝혔다. 또한 “의열단을 얘기할 때 마다 김원봉이 걸림돌이 되기도 해 안타깝다”고 했다.

김 교수는 “김원봉은 의열단을 끝까지는 책임 지지 않았다”면서 “그는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가고, 북경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설립했다”고 했다. 이날 김 교수가 제공한 특강 자료 중 ‘의열단 김원봉과 류자명의 엇갈린 길’이란 항목에 따르면 김원봉(1898~1958)은 1926년 황포군관학교 입학(4기)하고 북벌군에 참여했다. 국공내전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1930년에는 북경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설립했고, 1935년 민족혁명당을 창당하고 조선의용대 총대장이 됐다. 1942년 광복군 제1지대장,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지냈고 1945년 12월 귀국, 1948년 노덕술에 의해 체포됐다. 이후 월북해 최고인민회의 위원장이 된 뒤 1958년 숙청됐다.

초청 강연 참석자들이 김명섭 교수의 <류자명과 의열단> 강의를 듣고 있다.

일본이 아나키즘 왜곡해

반면 류자명(1894~1985)은 1922년부터 1931년까지 의열단 지키기에 몰두했다. 일제 고급밀정 김달하를 암살하고 나석주 의거를 기획했다. 1930년부터 1937년까지 남화한인청년연맹 의장 겸 대외책임자를 맡아 ‘남화통신’을 발간하고, 친일파를 숙청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항일구국연맹, 흑색공포단을 통해 육삼정의거, 일본 영사관 폭파, 친일파 제거 등에 몸을 던졌다. 1937년에는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창립했고, 조선의용대 지도위원을 역임했다. 1942년에 임시정부 학무차장을 맡았고, 해방 후인 1955년부터 1985년 작고 때까지 중국 후난농업대학 농학과 교수를 지냈다.

김원봉은 황포국관학교에 들어가면서 의열단과 떠나있었지만, 류자명은 끝까지 의열단을 지켰다는 설명이다. 그가 의장을 맡은 남화연맹의 강령을 보면 그의 신념의 일단을 읽어낼 수 있겠다. 강령은 △모든 조직은 자유연합 원리가 기본 △일체의 정치적 운동과 노동조합 지상운동 부인 △만인이 절대적으로 자유평등한 이상적 신사회 건설 등이다.

현재 의열단의 육삼정 의거와 관련한 백정기 기념관은 전북 정읍에 있고, 원심창 전시관이 있는 평택은 기념관을 건립할 예정이다. 이강훈은 광복회 회장을 지냈다. 하지만 의거를 기획한 류자명 선생을 기념할 곳이 없다는 게 김명섭 교수의 말이다. 육삼정 의거는 1933년 상해에서 주중 일본공사를 처단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김명섭 교수 초청 <류자명과 의열단> 강연을 마치고 주요 참석자들이 기념 사진을 남겼다. 앞줄 오른쪽에서 첫번째가 전홍식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두번째는 김명섭 교수, 세번째가 류인호 기념사업회장.

1922년 김원봉 단장을 통해 뒤늦게 의열단에 들어간 류자명은 1942년에 대한민국 좌우통합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됐다. 김 교수는 “류 선생이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라 무권력주의자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며 “임시정부는 애국자들의 자율적인 정부였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광복군 전신인 청년전지공작대, 조선의용대 독립투쟁 전선에 나가 한쪽에 치우치지 않아 왼쪽의 김원봉, 우측의 김구를 함께 아우를 수 있었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정치적 중립, 좌우 균형

자료에서 김 교수는 ‘의열단의 아나키즘과 공산주의 비교’ 표를 만들어 한눈에 구분해 볼 수 있게 했다. 한마디로 아나키즘은 박헌영‧김일성 등 공산주의 계열 등과 달리 무정부가 아닌 무권력‧무지배주의로 개인존중‧절대자유‧자유연합주의라는 것이다. 주요 이론가는 푸르동‧바쿠닌‧크로포트킨‧촘스키를, 당시 항일운동을 한 인물로는 의열단의 이회영‧신채호‧류자명을 들었다.

김 교수는 “류자명 선생은 일제 때부터 중국에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한국 이름을 한 번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며 “해방 후 귀국을 위해 홍콩까지 왔다가 전쟁 때문에 다시 돌아가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 중국, 북한 3국이 모두 공적을 인정한 독립운동가는 류자명이 유일할 것”이라며 “의열단과 류 선생을 기릴 곳이 없다”면서 충주에서의 사업 필요성을 강조했다.

중국 후난농업대학 내에 있는 류자명 선생 흉상. /독립기념관 제공<br>
중국 후난농업대학 내에 있는 류자명 선생 흉상. /독립기념관 제공

전홍식 류자명선생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또한 본보와의 통화에서 마찬가지 뜻을 밝혔다. 충주지역 일제침략 관련 역사학 박사인 그는 “이제는 류 선생에 대한 오해를 씻고 모두가 보듬어 안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한편 독립기념관 누리집에서 김명섭 교수의 <류자명의 의열단 활동과 의열투쟁> 제목의 31쪽 분량의 연구논문을 접할 수 있다. 논문은 류 선생의 항일운동 생애와 의열단 활동 내용 등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번 충주 강연의 핵심 내용도 이 논문이 바탕이다.

기념사업회, 선양사업 재추진 고민  

논문에서 김 교수는 “사상적 스승인 김한으로부터 공산주의사상을 사사받았지만, 마르크스의 학설에 동의하지 않고 대신 크로포트킨의 저작을 통독하면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이 시기에 대해 “개인의 절대자유와 공동체적 신사회 건설을 지향하는 크로포트킨의 아나르코 코뮤니즘을 수용한 1922년 여름 전후”라고 했다.

이어 “이러한 그의 신념은 곧 신채호의 민족사관과 맞닿으면서 ‘조선혁명선언’으로 표출되었으며, 1923년 가을 무렵에 이르러 선배투사인 신채호와 이회영을 아나키스트로 사상전변하도록 만든 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이와 관련해 강연에서 “조선혁명선언은 신채호 선생과 류자명 선생이 상해에서 합숙하며 구상한 것”이라며 “내용의 40% 이상은 류 선생이 설명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류자명은 광복 이후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숨을 거둘 때까지 중국 국적을 갖지 않았다. 그의 유해는 2002년 봉환돼 대전국립현충원에 모셔졌고 유품 200여 점은 충주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된 상태다. 류자명기념사업회는 중단된 선양사업의 본격적인 추진을 고민 중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