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도 건설업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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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건설업을 하고 싶다”
  • 박소영 기자
  • 승인 2023.12.01 09: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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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아파트 신화’의 주인공 정홍희 ㈜덕일건설 회장
IMF때 300억 부도 겨우 막아, 이후 골프장으로 사업전환
전국에 9000세대 아파트 분양, 20년 만에 시행사 재도전

청주지역 아파트 변천사
그 때 그 시절 이야기

 

정홍희 덕일건설 회장(68)은 청주 지역 아파트 역사의 산증인이다. 젊은 시절 덕일건설을 이끌며 덕일아파트 및 청주 최초의 25층 아파트인 분평주은프레지던트(2001)를 성공적으로 준공하며 이름을 날렸다. 그가 청주에 지은 아파트만 5000세대. 전국으로 따지면 9000세대다.

하지만 IMF(국제외환위기)로 인해 덕일건설도 부도 위기에 내몰렸다. 정 회장은 당시 부채가 300억이더라. 다 막고 다시 시작했다라고 회고한다. 건설업을 잠시 접고 2000년대부터는 골프장 사업에 눈을 돌렸다. 그러던 그가 올해 초 송절동에 민간임대주택협동조합형 방식으로 짓는 청주테크노위더시티의 시행을 맡았다. 20년 만의 왕의 귀환인 셈이다.

 

정홍희 ㈜덕일건설 회장은 청주 지역 아파트 역사의 산증인이다. /사진=박소영 기자 

 

 

파란만장한 인생사

 

정 회장은 87년 스포츠서울을 인수해 2010년 매각할 때까지 최대주주였기도 했고, 4개의 상호신용금고를 통합한 하나로저축은행을 한 때 소유하기도 했다. 지금은 모두 정리했다. “건설업을 하다보니 소상공인을 위해서는 지역의 금융사가 절실하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한때 금융업도 하고, 신문사도 소유한 적이 있다. 건설업을 하면서 정말 엄청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이 일을 한 건 후회가 없다. 지금도 건설업이 좋다.”

정 회장은 청주지역 아파트 역사를 줄줄이 꿴다. 그는 대한주택건설협회 3대 회장을 맡기도 했고, 그 때만해도 택지개발을 할 경우 아파트 부지 선정을 협회를 통해 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지역건설사 사정을 잘 알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한다.

 

면허없어 빌려서 지었다

 

1985년 한국중소주택사업자협회(현 대한주택건설협회)가 창립됐고 이듬해 충북지회가 만들어졌다. 아파트 건설은 몇 번의 변곡점이 있었다. 1980년 이전만 해도 청주시 인구가 10만 정도였다고. 정 회장은 “80년대 이전에는 연립주택이 많았다. 연립주택은 5층이하라서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지 않아도 돼 선호했다. 아파트는 5층 높이로 처음 지어졌고, 세대별 기름보일러를 설치했다. 지금과 같은 열병합발전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직주공아파트만 해도 기름보일러가 아닌 연탄보일러를 놓았던 시절이다라고 설명했다.

구도심을 중심으로 땅만 생기면 지역건설사가 아파트를 지어올렸다. 외곽개발이 되면서 다 밖으로 나갔지만 평화건설은 특이하게도 구도심에만 평화아파트를 동네별로 지었다고 한다.

이어 그는 청주지역도 아파트 건설 붐이 노태우 정권의 200만호 건설 정책과 맞물러 시작된다. 이전에는 아파트 시공이 모두 연대보증 형태인데다 지역업체는 종합면허권이 없어서 서울업체에게 일종의 개런티(면허비)를 주고 시공했다. 이래저래 위험을 안고 하다보니 중간에 잘못된 경우도 빈번했다. 당시 이자도 10%를 훌쩍 넘겼다. 지금의 고금리는 명함도 못 내민다라고 덧붙였다.

1988년에야 주택사업등록업자에게 저층시공권을 부여했다. 지역업체들도 건설업 면허를 부여받아 사업을 자체적으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건설사들도 잇따라 생겨났다. 90년대는 이들의 세상이었다.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건설업체들이 덕일을 비롯해 세원건설, 부강건설, 진흥건설, 태암주택, 원건설, 미림건설, 삼진건설, 경희주택, 보성주택, 신라건설 등이다. 후발주자가 천일건설, 세지건설, 두진건설, 형석건설, 덕성건설 등이다. 1세대 건설사 중 살아남은 곳은 원건설과 신라건설, 덕일건설 정도다. 건설업을 하다 잠시 다른 곳으로 사업방향을 튼 곳들이 결국 살아남았다. 형석건설은 형석학원을 운영했고, 덕일건설은 골프장 사업을 했다. 미림건설은 나산개발로 이름을 바꾸고 지금은 시행사를 하고 있다. 신라건설은 아파트 건설사업을 오래 하지 않았다.

 

2001년 준공한 주은프레지던트는 청주 최초의 25층 아파트였다. 이후 최고층 아파트는 49층까지 생겨났다. /사진=박소영 기자
2001년 덕일건설이 준공한 주은프레지던트는 청주 최초의 25층 아파트였다. 이후 최고층 아파트는 49층까지 생겨났다. /사진=박소영 기자

 

1세대 결국 역사속으로

 

덕일건설이 청주에 처음 지은 아파트는 수동 삼일공원 올라가는 길에 86년 지은 덕일파크빌라였다. 정 회장은 이전에는 건설업자들이 찔끔찔끔 공지에 아파트를 짓다가 토지공사에서 택지개발을 시작했다. 덕일건설도 1989년에 덕일아파트 350세대를 복대동에 짓게 됐다. 이후 복대동, 가경동, 분평동, 용암동 택지개발이 본격화되고 대단위 아파트가 등장했다라고 설명했다.

또 공법도 좋아졌다. 70년대에는 봇짐을 지고 시멘트에 자갈 등을 섞어 건물을 올렸다면 레미콘이 등장했고, 이후 펌프카가 나와 고층아파트를 짓게 됐다. 그래서 80년대 이전 5층 아파트가 90년대에는 15층으로, 2000년대는 25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최근 사직 4구역 59층 아파트까지 승인이 났다. 현재까지는 청주시내에 49층이 최고층 아파트다.

청주지역에서 대규모 택지개발을 할 때마다 지역업체들이 참여했다. 가경동 택지개발엔 덕일, 삼일, 형석건설이 참여했고, 산남동은 덕일, 보성, 두진건설이 시공했다. 용암동은 덕일과 현대산업개발이 참여했고, 다른 청주 지역업체들은 끼지 못했다. 이전까지는 지역업체들이 추첨을 통해 공동주택부지를 분양받았는데 용암동 택지개발부터 공개입찰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오창산단조성 당시 공동주택부지 분양이 1996년 시작됐다. 이때 지역건설사들이 공동주택부지를 다 받았지만 IMF(국제외환위기)로 인해 반납해야 했다. 결국 타 지역 업체들이 와서 사업을 진행했고, 지역업체론 원건설만이 참여해 힐데스하임을 분양하는 데 성공했다. 지역업체는 열매를 하나도 얻지 못했다.” 그는 건설업에 종사하면서 지역업체들의 흥망성쇠를 가까이서 지켜봤다. 지역건설사의 한 시대가 저물고, 지금은 대형건설사들의 브랜드아파트가 청주를 뒤덮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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