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피는 와인’이라고 말하는 조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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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피는 와인’이라고 말하는 조지아
  • 고재열 전문기자
  • 승인 2023.12.13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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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지 자처…‘술 마시느라 늦었다’는 핑계 통해
잔치 때 한 사람당 스물여섯 잔을 준비하는 나라
카헤티 지방이 대표적인 산지, 기행 장소로 적합
조지아를 돌아다니다 보면 시골 어르신들이 막걸리를 권하듯 걸핏하면 와인을 권하는 것을 접할 수 있다. 그들에겐 술이 인사다.
조지아를 돌아다니다 보면 시골 어르신들이 막걸리를 권하듯 걸핏하면 와인을 권하는 것을 접할 수 있다. 그들에겐 술이 인사다. 사진=고재열

코카서스의 이웃 나라인 조지아(옛 그루지야)와 아르메니아는 와인 발상지를 두고 다툰다. 먼저 조지아 사람이 우리에겐 가장 오래된 와인 양조 유물인 크베브리(Qvevri)’ 항아리가 있다라고 증거를 들이댄다. 그러면 아르메니아 사람은 한심하다는 듯 대꾸한다. “, 너 성경 안 믿어? 성경에 노아가 와인에 취했잖아? 노아의 방주가 어디에 걸렸어?”

안타깝게도 노아의 방주가 걸렸던 아라랏산은 지금 튀르키예(옛 터키) 땅이다. 그러므로 와인 종주국 논쟁에는 튀르키예도 끼어들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이 논쟁은 조지아는 와인, 아르메니아는 브랜디(아라랏 꼬냑)로 기분 좋게 정리된다. 물론 조지아에도 브랜디인 차차가 있고 아르메니아도 요즘 와인 붐이 일긴 했지만 말이다.

조지아의 북쪽 국경은 코카서스 산맥이 장관을 이룬다.
조지아의 북쪽 국경은 코카서스 산맥이 장관을 이룬다.

조지아는 와인의 나라다. 술 문화로 보면 우리에게 형제의 나라는 튀르키예가 아니라 조지아가 되어야 맞다. ‘술 마시고 그런 건데혹은 술 마시다 늦은 건데라는 핑계가 통용될 수 있는 나라가 바로 조지아다. 와인에 대한 조지아인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들은 우리들의 피는 와인으로 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조지아인들이 자신들의 와인 사랑을 이야기할 때 드는 우화가 있다. 신이 각 나라 사람들을 전부 불러 모았는데 조지아 사람만 늦었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와인을 마시며 신에 대해 이야기했다라고 변명했다는 것이다. 신도 포기할 만큼 와인에 집착하는 사람이 바로 조지아인이다.

요즘은 조지아에서도 와인 8000과 같이 와인 시음을 위한 전문 매장이 성황이다
요즘은 조지아에서도 와인 8000과 같이 와인 시음을 위한 전문 매장이 성황이다

조지아를 돌아다니다 보면 시골 어르신들이 막걸리를 권하듯 걸핏하면 와인을 권하는 것을 접할 수 있다. 그들에겐 술이 인사다. 그런 조지아에서는 함부로 술 자랑하면 안 된다.

조지아인들은 잔치를 치를 때 인당 스물여섯 잔(크베브리 잔 기준)을 준비하는 것이 관례다. 장례식에서는 조금 자제해서 인당 열여덟 잔의 와인을 준비한다고 한다. 우리의 막걸리 말통처럼 와인 말통을 옆에 끼고 마시는 사람이 바로 조지아인들이다.

오래된 와인이 들어찬 저장고.
오래된 와인이 들어찬 저장고.

심지어 잔치 때 마시는 잔은 짐승의 뿔로 만든 뿔잔이다. 마시다가 바닥에 내려놓을 수 없으니 받으면 바로 다 마셔야 하는 원샷 잔이다. 조지아인들은 새해가 되면 한 달 동안 이런 파티를 즐긴다고 한다. 와인만 가지고도 해가 갈 것 같은데 맥주도 즐기고 브랜디 짜짜도 즐기고 보드카도 즐긴다. 편의점에 가보면 매장의 절반이 술이다. 정말 대단한 술존심이다.

조지아인들이 잔치에 술을 준비할 때는 원칙이 있다. 여러 가지 와인을 섞어 마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와인의 나라 조지아 사람들이 우리나라 와인 동호회 회원들이 오만가지 와인을 섞어서 시음회 하는 모습을 보면 아마 기겁할 것이다. 물론 요즘은 조지아에서도 <와인 8000>과 같이 와인 시음을 위한 전문 매장이 성황이다.


식전에만 다섯 번 건배

 

조지아의 주도는 이렇다. 술자리를 이끄는 타마다가우마조스(cheers)’를 외치며 건배 제의를 한다. 식전에만 다섯 번을 건배한다. 맨 처음은 신에게 그다음은 평화를 위해, 그다음은 성조지를 위해, 대략 이런 순서다. 가우마조스는 병권을 이어받은 다른 멤버로 이어진다. 조지아인들은 와인 세 잔은 곰(bear)이 되게 만들고 그다음 세 잔은 황소(bull)가 되게 만들고 그다음 세 잔은 새(bird)가 되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취하는 것 같으면 스스로 멈춰야 한다.

와인과 포도나무는 조지아인들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제정러시아 시대에 러시아가 조지아를 지배하면서 조지아인을 정신적으로 굴복시키기 위해 한 조치가 포도나무밭을 폐허로 만드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포도나무가 단순한 식물 이상의 자아였기에 포도밭 파괴에 큰 상처를 받았다. 그렇게 소중하게 지켜온 덕분에 지금도 조지아에는 500여 종의 포도 품종이 있다.

포도나무는 조지아인의 자아다. 2차 세계대전 때 조지아의 많은 청년들이 전쟁에 징발되었다. 스탈린이 조지아 출신인데 오히려 그는 조지아에 더 가혹해서 조지아 징집자가 많았다고 한다. 징집된 조지아 청년들은 포도나무 가지로 허리띠를 하고 갔다. 그리고 포탄이나 총에 맞아 죽어갈 때 자신이 쓰러진 그 자리에 포도나무 가지를 심었다고 한다.

스탈린은 조지아 중심부의 고리시 출신이다. 고리시에 가면 스탈린 기념관이 있는데 그에 대한 조지아인의 정서는 박정희에 대한 우리의 정서와 비슷하다. 어르신들은 그리워하고 젊은이들은 싫어한다. 소문난 애주가로 알려진 스탈린이 고향의 와인을 즐겼을지로 모르지만, 그는 러시아 보드카와 아르메니아 브랜디를 주로 즐긴 것으로 알려졌다.

스탈린은 조지아 중심부의 고리시 출신이다. 고리시에 가면 스탈린 기념관이 있다.
스탈린은 조지아 중심부의 고리시 출신이다. 고리시에 가면 스탈린 기념관이 있다.

구 소련 체제에서 조지아는 소련의 주요 와인 생산지였지만 품종 통폐합이라는 수난을 당했다. 구 소련 당시 조지아 레드와인은 사페라비(Saperavi)’ 품종으로, 화이트와인은 르카치텔리(Rkatsiteli)’ 품종으로 통일되었다(그래서 지금도 이 품종의 와인이 많다). 다행히 독립 후 조지아인들의 노력으로 지금은 500종 정도의 품종이 생산되고 있다.


크베브리라는 옹기에서 숙성


조지아에서 와인기행을 위해 꼭 방문해야 할 곳은 북동쪽의 카헤티 지방이다. 코카서스 산맥 아래 드넓은 평야가 있는 이곳이 조지아의 대표적인 와인 산지다. 유명한 와이너리가 많은데 그중 트윈 셀라(Twin’s Cellar)라는 와이너리에 들렀던 적이 있다. 쌍둥이 형제가 운영하는 곳으로 정통 크베브리 와인의 제조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조지아의 전통음식들
조지아의 전통음식들

조지아 와인을 숙성하는 크베브리는 우리의 옹기와 비슷한 토기다. 크베브리 와인은 으깬 포도를 넣은 점토항아리를 땅에 묻어 발효시킨 와인을 말한다. 오가닉 와인이 인기를 끌면서 그 원조격인 크베브리 와인의 인기 또한 높아졌다. 지금도 여느 조지아 농가에서 이 크베브리 와인을 볼 수 있다.

정통 크베브리 방식으로 만은 와인은 은은한 금빛이 난다. 조지아는 이 크베브리 방식의 와인 제조법은 우리 김치와 같은 해인 201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크베브리 와인이 와인의 원형을 간직한 와인이기 때문에 미슐랭 가이드에 나오는 유럽 고급 레스토랑 중에서는 의무감으로 구비하는 곳들도 있다고 한다.

조지아 와인의 특징은 일단 포도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조지아인들은 3km마다 기후가 달라져서 포도 품종도 다르다고 말한다. 레드와인은 사페라비 종으로 만든 와인이 가장 많은데 한국인들은 프랑스 와인과 느낌이 비슷한 무크자니(Mukuzani)를 선호한다. 화이트 와인은 르카치텔리 품종이 많고 그중 치난달리(Tsinandali)가 잘 알려져 있다.

조지아 와인 중에는 스토리를 가진 와인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피로스마니(Pirosmani)이다. 피로스마니는 심수봉씨가 번안한 라트비아 민요 백만 송이 장미의 실제 모델로 조지아의 화가 이름이다.

사모하던 여인에게 백만 송이 장미를 바치고도 사랑을 얻지 못한 화가인데 그 장미가 바로 포도나무농장에서 비롯되었다. 보통 와인을 만들 포도를 기르는 농장에서는 담장에 장미를 심는다. 장미가 포도나무의 상태를 알려주는 카나리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만족할 수 있는 맛


조지아 와인은 프랑스 와인처럼 복잡한 맛을 지향하지 않고 이탈리아 와인처럼 심플한 맛을 추구한다. 와인을 하나의 소스로 보는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와인이 식사의 반주로 발전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조지아 와인에 대한 평은 누구나 마실 수 있는 가격에 누구나 만족할 수 있는 맛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카헤티 지방을 지나서 코카서스 산맥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낭만의 도시 시그나기가 나오는데 이곳이 와인을 즐기기에 좋은 휴양지다. 이곳의 명소는 꿩의 눈물(Pheasant’s tears)’이라는 와인바다. 미국에서 온 화가가 운영하는 이 바는 카헤티 지역의 와인을 세계에 알리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시그나기에서 무크자니 마을을 지나 텔라비로 가는 길에는 조지아 와인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저택이 하나 나온다. 19세기 귀족 시인 알렉산더 차우차바제가 소유했던 대저택을 치난달리 박물관으로 바꾸었다. 조지아 와인을 정립한 사람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박물관에 딸린 와인리조트도 있어서 와인으로 꽉 찬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이와 함께 조지아 와인 문화를 경험하기 위해서 꼭 가봐야 할 곳이 조지아 와인 8000년의 역사를 대변하기 위해 늘 와인 8000병을 구비하고 있는 <와인 8000>이다. 젊은 조지아 청년들이 조지아 와인을 탐구하듯 마시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와인에 진심인 조지아인을 확인할 수 있다.

떼루아가 어떻고’ ‘마리아주가 어떻고’ ‘디캔딩은 어때야 하며등등 와인에 대해 주절주절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여행이 바로 조지아 와인기행이다. 자신들의 핏줄에는 와인이 흐른다고 말하는 조지아인들의 와인의, 와인에 의한, 와인을 위한 삶을 들여다보면 와인에 대한 자세가 좀더 겸손해질 것이다.

●고재열

‘바쁜 현대인을 위한 어른의 여행’을 기획하는 여행감독이다. 시사저널과 시사IN에서 20년간 기자로 일했다. ‘트래블러스랩’이라는 여행클럽을 운영하며 <월간 고재열>이라는 여행을 매월 발행한다. ‘어른의 허비학교’라는 스테이형 여행도 기획한다. <미리 써본 북한여행 기획서> <생애, 전환, 학교> <기자로 산다는 것 1,2>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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