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도 부대의 두 글쟁이 방현석‧이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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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도 부대의 두 글쟁이 방현석‧이동순
  • 이재표 기자
  • 승인 2023.12.20 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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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4, 15일 청주에서 유튜브 특집 생방송 출연
두 작가, 끝나지 않은 항일무장투쟁 종군작가 자처
소설 [범도]를 쓴 방현석 소설가와 시집 [내가 홍범도다]의 이동순 시인이 각각 12월 14일, 15일 청주를 찾아 유튜브 생방송에 참여했다. 홍범도 흉상 철거 논란을 계기로 오히려 화제를 모으고 있는 두 책. 사진=이재표 기자.
소설 [범도]를 쓴 방현석 소설가와 시집 [내가 홍범도다]의 이동순 시인이 각각 12월 14일, 15일 청주를 찾아 유튜브 생방송에 참여했다. 홍범도 흉상 철거 논란을 계기로 오히려 화제를 모으고 있는 두 책. 사진=이재표 기자.

정부가 육군사관학교에 세워놓은 홍범도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겠다고 나서는 이 시대에 외려 이름 없는 전사들까지 호명하는 이가 있다. 소설 <범도>를 통해 그들의 동상을 세워나가는 방현석 소설가다.

홍범도 장군의 육성으로 시대를 향해 일갈하는 시인도 있다. “네놈들이 내 흉상을 없애 나는 수억만 개 꽃으로 피어나 이 땅덩이 덮을 거야어디 한 번 막아봐라고 호통치는 이동순 시인이다.

두 사람이 1214, 15일 충북 청주를 방문했다. 유튜브 방송사인 와우팟의 미디어Z 채널로 방송하는 다독다독(다독다)에 출연하기 위해서였다. 김은숙 시인이 진행하는 다독다독은 20218월부터 매달 두 차례 충북 및 전국의 작가들을 초청해 생방송으로 책담(冊談)을 나누고 있다.

두 차례 방송은 2023년을 마감하며 특집으로 마련됐다. 이틀간의 방송을 요약했다. 책에 대한 스포일러는 자제했다. 기사를 읽고 나서 소설 <범도>(문학동네)와 시집 <내가 홍범도다>(한길사)를 읽게 만들기 위해 기사를 쓴다.


범도가 들려주는 무명씨들의 투쟁사

그런 사람들이 남겨놓은 나라에 우리가 살아

 

소설 <범도>는 홍범도 장군의 이름 두 자를 딴 책이지만 봉오동전투의 영웅 홍범도만을 그린 책이 아니다. 방현석 소설가는 이름을 남기지 못한 분들이 너무나 많고, 이름을 남긴 분들조차도 역사가 이름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그분들의 이름을 소설 속에서라도 불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독자들이 그런 부분을 읽어주셨으면 좋겠다는 것이 작가의 바람이다. 이름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 역사가 이름 없는 사람들로 만들어 버린 사람들은 도대체 누굴까? 방현석 소설가는 봉오동을 바쳐서 봉오동전투에서 승리했다라고 표현하며, 150여 가구가 살았던 봉오동 사람들 전부를 한 예로 들었다.

당시 봉오동은 베풀어주는 지주 최진동이 있고, 사병부대가 마적들을 막아냈으며, 학교도 두 개나 있었던 유토피아였는데도, 주민들이 마을이 참혹하게 파괴되는 상황을 감수하면서 삶터를 전장(戰場)으로 내놓았다는 얘기다.

방현석 소설가. 사진=이재표
방현석 소설가. 사진=이재표

방 소설가는 소설 속에서 봉오동의 촌장이 홍범도 장군에게 여기서 싸워라. 우리가 봉오동을 내주면 이길 수 있느냐고 묻는 장면과 봉오동을 내놉세. 대한이 이겨야지라고 결단하는 장면을 소개했다.

방현석 소설가는 영화 <봉오동전투>(2019, 감독 원신연)에서 배우 류준열이 독립군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단신으로 정예 일본군 부대를 유인하는 장면도 예로 들면서 그게 독립군의 전술이다. 죽기를 무릅쓰고 싸우는 동안 부대는 후퇴해 전열을 정비하고, 다시 싸우는. ‘나를 희생해 독립군을 지킨다. 나아가 독립군을 희생해서 우리나라를 지킨다는 것이 그들의 정신이었다고 강조했다.

작가는 그런 사람들이 남겨놓은 나라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담담한 듯하면서도 결연하게 말했다.

 

흉상 철거 논란 전 출간

 

소설 <범도>202367, 봉오동전투 103주년에 맞추어 출간됐다. 자칫 정부가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하기로 한 것을 기화로 기획 출판한 책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부의 계획이 언론에 공개된 것은 책이 나오고도 두 달여 뒤인 8월 하순이다.

<범도>13년여에 걸친 취재와 집필을 통해 탄생했다. 12권을 합쳐 무려 1400쪽에 이르는 이른바 벽돌책이다. 물론 정부가 흉상 철거 계획을 발표하면서 명성을 얻고 판매 부수가 늘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전국에서 홍범도 바로 알기 열풍이 일어나면서 <범도> 읽기, 작가 초대 행사도 봇물이 터지듯 하고 있는 까닭이다.

방현석 소설가는 자신을 범도 부대원, 종군작가라고 소개했다. “책을 내고 나서 제대한 줄 알고 홍범도 장군의 묘소가 있는 대전 현충원에 가서 전역 신고도 했는데, 재입대하라고 해서 이렇게 전국을 다니고 있다는 것. “홍범도 장군의 사람들 덕분에 이렇게 전국을 여행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방 소설가는 재입대를 느껍게 받아들이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방현석 소설가는 소설 뒤에 편집한 작가의 말에서 홍범도를 위대한 장군으로 그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나는 홍범도를 통해 한 시대의 가치가 어떻게 새롭게 출현하고, 그 가치가 어떻게 낡은 가치를 돌파하면서 자신의 길을 가는지를 알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다. 매력적인 어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항일무장투쟁사를 소설로 쓰고 싶었다는 얘기다.

 

서서 쓰다 누워서도 쓴 책

 

방현석 소설가는 그 어떤 사람도 항일무장투쟁사 전체를 총체적으로 보여줄 수 없었다주인공을 여러 번 바꾸면서 쓰다가 실패하고, 그 사람이 홍범도 장군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 10년이 걸렸다고 고백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홍범도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 걸까? 작가는 일제 강점기 만주로 이주해 살았던 조부와 선친의 삶에 대해 써보기 위해 현지를 답사했다가 눈물겹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났다고 설명했다. 그곳은 신흥무관학교를 처음 열었던 서간도 류하현(柳河縣)이었다.

방현석 소설가는 봉오동전투가 있었던 북간도와 안중근 의사가 처형되고 신채호 선생이 순국한 다롄의 뤼순 감옥까지 돌아보면서 이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외면하고 뭘 써왔나?’ 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그들의 이야기가 말을 걸어왔고 그렇게 시작한 것이 13, 벽돌 두 장이 되고 말았다고 덧붙였다.

10년 가까이 현장을 다니고 자료를 수집하며 구상하고 준비했다. 이후 3년 반에 걸쳐 집필하는 동안 그는 철저히 범도 부대원이었다. 매주 50매를 썼지만, 이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행복했단다.

방현석 소설가는 친구들과 만나 맥주 마시는 시간도 재미가 없었고 빨리 집에 가서 부대원들과 얘기하고 내일 어떻게 싸울지 계획을 세우는 것이 훨씬 재미있고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대작을 쓰는 일은 과정도 치열했다. 1년 반이 지나니 허리가 아파 앉아서는 쓸 수가 없었다. 서서 쓰는 책상을 샀고 서서 날을 새기도 했다. 나중에는 노트북을 매달아 놓고 누워서도 썼다. 그렇게 해서, 초고 5300매를 썼다. 하지만 출판사(문학동네)에서 아무리 재미있는 책도 두 권이 넘어가면 안 읽는다며 원고를 줄여달라고 간청했다.

그래서 무려 1200매를 덜어낸 4300매로, 소설 <범도>가 탄생했다. 내용을 줄이려다 보니 등장인물도 꽤 줄어야 했다. 작가는 그게 안타까워 에필로그 뒤에 쓰지 못한 이야기 그들을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로도 부족했나 보다. 방현석 소설가 이날 내 소설로도 이름을 불러주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물론 소설에 담지 못했던 사람들을 호명하기 위해 인명사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방현석 소설가는 적어도 창작자를 위한 항일무장투쟁 인명사전이 되기를 바란다소설이나 시를 쓰는 사람, 뮤지컬이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한 분씩 맡아서 나를 이어 써달라고 덧붙였다. 방현석 소설가는 다독다독의 마무리 발언으로 이 같은 계획을 밝혀 방청객들의 박수를 받았다.


범도의 육성으로 듣는 통쾌한 울분

“1982년 청주에서 단재 통해 홍범도 만나

 

역설적이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 철거 논란은 홍범도 바로 알기를 너머 홍범도 장군을 더욱 기리게 했다.

이동순 시인은 네놈들이 / 내 흉상 없애면 / 나는 수억만 개 꽃으로 피어나 / 이 땅덩이 덮을 거야 // (중략) 피어나는 꽃을 / 손바닥으로 가리려는 / 그런 얼빠진 바보는 세상에 없지 / 어디 한번 막아봐라고 호통친다. 피어나는 꽃20231025일 홍범도 장군 순국 80주기에 맞춰 출간한 시집 <내가 홍범도다>(한길사)에 실렸다.

이동순 시인. 사진=이재표 기자
이동순 시인. 사진=이재표 기자

이 시집은 흉상 철거 논란 이후에 나왔지만 독립운동가 이명균 선생의 후손인 이동순 시인의 홍범도 연구는 무려 41년 전인 19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대구에 사는 이동순 시인은 1215일 책담방송 다독다독에서 충북대 교수로 오게 된 1982년 청주에서 민족서사시 <홍범도>를 쓰기 시작해 5부작 10권을 완간했고, 다시 20년이 흐른 올해 삼일절을 맞아 평전 <민족의 장군 홍범도>를 발간했다청주에 올 때마다 감개무량함을 형언할 길이 없다고 밝혔다.

이동순 시인은 또 청주 정착 초기에 돌이 지난 아들을 안고 낭성면 귀래리에 있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소를 여러 차례 찾았고, 단재 총서를 읽으며 단재 논문 세 편을 썼다신채호 선생을 통해 홍범도 장군을 발견했다고도 했다.

<나는 홍범도다>는 무당이 공수하듯 홍범도 장군의 육성으로 쓴 시들을 엮었다. ‘홍범도 장군의 절규에서는 내 동상을 창고에 가두지 말고 / 내 뼈를 다시 중앙아시아 /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보내주게 / 나 기다리는 고려인들께 가려네라며 절규한다.

이 시인은 홍범도 장군의 위상은 이미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상식과 규범이 되었다면서 독립투사의 흉상에, 산업 쓰레기를 갖다 버리는 것처럼 철거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불경스럽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애초 홍범도 장군의 절규라는 시는 SNS를 통해 알려졌다. 단박에 공유 수가 무려 100만 회에 이를 정도였다. 그런데 왜적이라는 단어가 혐오 표현이라며 강제로 지워졌다. 공유한 사용자의 글도 삭제됐다. 50편의 시를 묶어 아예 시집을 낸 배경이다.

이 시인은 방송에서 홍범도 장군이 빙의한 것처럼, 장군의 육성인양 낭송했다. 때로는 일갈하고 때로는 한탄하는 통쾌한 울분으로 들렸던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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