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에 살면 유쾌하지 않기도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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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에 살면 유쾌하지 않기도 어려워
  • 정연일 여행가
  • 승인 2023.12.26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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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유적을 보는 것보다 중요한 건 바울처럼 사는 것

지중해 몰타 기행 ⑫

임디나의 사도 바울 대성당에서 나와 조금 걸으면 또 다른 성당이 나온다. 수태고지(受胎告知) 성당이다. 가톨릭 문화권의 어지간한 도시에는 대성당 외에도 수태고지 성당이 있다. 개신교에서는 수태고지라고 하나, 가톨릭에서는 성모영보(聖母領報) 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를 예고한 사건을 말한다.

임디나의 수태고지 성당
임디나의 수태고지 성당. 사진=정연일

성당 이름 중에서 흔히 보이는 ‘Annunciation’이라는 단어가 수태고지 또는 성모영보라는 뜻이다. 고지, 통보 등을 뜻하는 어나운스(announce)라는 영어 단어를 떠올리면 금방 이해가 된다.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떠올리면 더 쉽다.

동정녀에게 천사가 나타나 수태를 고지한다는 극적인 내용 때문인지 정말 수많은 화가가 수태고지를 그렸다. 그림의 구도와 표현법은 화가마다 모두 다르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책을 읽거나 뜨개질 등 앉아서 뭔가를 하는 동정녀 마리아와 백합을 든 가브리엘 천사가 등장한다.

임디나의 수태고지 성당 주 제단과 돔. 사진=정연일
임디나의 수태고지 성당 주 제단과 돔. 사진=정연일

백합은 자웅동체인 꽃이라 동정녀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한다. 마리아의 표정과 몸짓은 작품마다 다르다. 감당하기 힘든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통보를 받을 때 사람마다 감정의 표출방식은 모두 다를 것이다. 운명을 처연히 받아들이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화들짝 놀란 표정과 몸짓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임디나의 수태고지 성당은 사도 바울 대성당보다는 규모가 작아서 그런지, 내부에 들어가면 화려하거나 위압적이라는 느낌보다는 아담하고 포근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영문으로 된 성당 안내를 읽어보니 수태고지 성당을 세운 주체는 가르멜 수도회이다. 지금은 가르멜이라는 표기가 더 많이 보이지만 내게는 과거에 쓰던 갈멜이라는 표기가 더 친숙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태고지 화. 우피치 미술관 소장. 사진=위키피디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태고지 화. 우피치 미술관 소장. 사진=위키피디아

가르멜은 현재의 이스라엘 갈릴리 지방의 야트막한 산 이름이다. 가르멜산에 성지순례객과 운둔 수도자들이 모여 살았던 것에서 수도회가 유래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가르멜 수도회의 관구와 수도원 수녀원이 있다. 대부분의 수도회가 그렇듯이, 가르멜 수도회도 침묵과 관상(觀想), 그리고 청빈과 엄격한 규율이 요구된다고 한다.

중 고등학교 시절 개신교 교회를 5년 정도 다녔으나 가톨릭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유럽을 다니며 수많은 나라의 수많은 성당을 다니면서 그 때 마다 하나씩 찾아보며 무지를 많이 깨우쳤다. 유럽의 가톨릭 문화권을 다니면 수많은 성당을 찾게 된다.

한국에 다녀 간 적이 있다는 임디나가 고향인 몰타 노인.
한국에 다녀 간 적이 있다는 임디나가 고향인 몰타 노인.

파리의 노틀담을 비롯한 대성당의 화려함과 장엄함에 반하지만, 하나의 도시에도 수십 수백 개의 성당이 있다 보니 금세 질려버리는 것이 또 성당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는 말은 성당에도 역시 적용된다. 요즘은 스마트폰 덕분에 즉석에서 쉽고 편하게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사도 바울 대성당과 달리 수태고지 성당은 입장료가 없어, 임디나를 찾는 관광객들은 다들 한 번씩 들어와 본다. 나 역시 임디나를 찾을 때면 빼놓지 않고 들러 잠깐이라도 눈을 감고 앉아 있는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교회를 떠났고 가톨릭 신자도 아니지만 수도회 소속 성당에 들어가면 대체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험을 많이 했다. 아마도 수도사들의 정갈하고 청빈함이 성당에서 느껴져서 그런지 모르겠다.

 

난공불락의 임디나 요새

 

임디나 성벽, 옛 포대 자리의 전망대 풍경.
임디나 성벽, 옛 포대 자리의 전망대 풍경.

성당에서 나와 전망대로 향하는데 한 남자 노인이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말을 건다. 유럽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동북아 사람은 중국 아니면 일본이라는 인식이 강한데, 이 노인은 코리아?”라고 먼저 물어본다. 한국인인 것을 어떻게 알았냐 물으니 한국에 가봤다고. 그러면서 일반적으로 외국인이 잘 모르는 한국의 지명을 말한다.

관광이 아니라 과거 한국이 저개발국이었던 시절 한국에 기술 전수를 하러 갔던 사람들이다. 몰타뿐만 아니라 유럽 다른 나라에서도 한국에 가봤다며 서울이 아니라 부산 울산 거제 등을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엔지니어였다. 주로 조선 선박 쪽 종사자들이 많았다.

소풍 나온 몰타의 초등학생들.
소풍 나온 몰타의 초등학생들.

백발조차 다 벗겨진 노인은 임디나가 고향이라고 했다. 몰타 남자답게 얘기를 나누는 시종일관 유쾌했다. 연세를 여쭤보니 여든에 가까운데도 활력이 넘쳤다. 지중해 일대를 여행하다 보면 세계의 장수 지역 중 하나라는 게 실감하는 순간이 종종 있는데 이 노인과 짧은 만남도 그랬다.

4월인데도 이렇게 화창하고 뜨거운 지중해에서 살면 노인처럼 유쾌하지 않기가 오히려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평생 지중해에서 살아온 사람의 느낌이 노인에게서 물씬 풍겼다.

임디나의 메스키타(모스크) 광장.
임디나의 메스키타(모스크) 광장.

노인과 헤어져 임디나의 전망대로 향한다. 역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오각형 별 모양으로 생긴 임디나의 요새 성벽의 한 꼭지점에 위치한 옛 포대 자리이다. 성벽에 오르니 일망무제의 탁 트인 전망이 눈에 들어온다.

방어에는 수월했겠지만 공격자에게는 지옥 같은 난공불락의 요새였을 것이다. 소풍을 나온 몰타의 초등학생 아이들이 전망대 성벽에 나란히 붙어 있는 모습이 정겹다. 지중해의 건조하고 상쾌한 미풍에 실려 퍼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너무나 듣기 좋다.

메스키타 광장 카페의 실내.
메스키타 광장 카페의 실내.

전망대에서 임디나의 주 성문(Main gate)까지 직선거리는 채 500m도 되지 않는다. 임디나의 가로 폭도 역시 400m 정도다. 발레타 이전 임디나가 몰타의 수도였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고구려의 평양 천도처럼 좁으니 이사간 것이다. 고조섬의 빅토리아는 비스듬한 경사에 세워졌지만, 임디나는 평평한 언덕 위에 세워져 빅토리아보다 골목이 더 복잡하게 발달해있다. 바둑판처럼 설계된 발레타와 달리, 외부 침입자들에게 혼동을 주기 위해 복잡하게 설계했기 때문이다.

성벽으로 둘러싼 요새 도시는 비록 골목이 미로처럼 복잡하더라도 성벽 바깥으로만 나가지 않는다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모로 가도 서울이라는 말처럼 골목을 헤매다 보면 중심가와 주 성문이 나오기 때문이다.

마치 북아프리카의 어느 도시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임디나의 골목길.
마치 북아프리카의 어느 도시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임디나의 골목길.

항구인 발레타에 비해 임디나는 내륙에 있어 매일 여러 척의 크루즈 선에서 쏟아져 나오는 관광객의 수가 훨씬 적다. 그렇지 않아도 적은 관광객이 골목으로 접어들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임디나의 골목을 걷다 보면 골목과 골목이 만나고 겹치는 지점에서 빛의 조화로 기막히게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한다. 도시의 골목은 이방인 여행자에겐 때로는 위험할 수도 있지만 임디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매력이다.

 

노천카페에서 화이트와인을

 

임디나의 대문 손잡이.
임디나의 대문 손잡이.

골목을 따라 헤매다 보면 이런 곳에 광장이 있었나 싶은 숨겨진 듯한 작은 광장이 나온다. 임디나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장소이기도 한 광장의 이름은 메스키타(Mezquita)이다.

메스키타는 스페인어로 모스크를 뜻한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을 여행했던 이라면 이슬람 지배 시절의 모스크를 성당으로 개조한 코르도바의 메스키타를 떠올릴 것이다. 임디나의 메스키타 광장 역시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과거 이슬람 지배 시절 모스크가 있던 광장이다.

메스키타 광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름답기도 하지만, 광장에 있는 몇 개의 노천카페 때문이다. 임디나에 오면 메스키타 광장의 노천카페에 앉아 몰타산 화이트와인을 마시는 걸 잊지 않는다. 이탈리아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몰타 역시 지중해 연안 국가답게 와인을 만든다. 광장의 노천카페에 앉아 지중해 봄 햇볕을 쬐며 마시는 한 잔의 화이트와인은 여행의 피로를 가시게 하고 흥취는 돋운다.

첫 방문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빅토리아처럼 임디나 역시 구석구석 관리의 손길이 느껴진다. 임디나의 명물은 다른 색으로 칠해진 집의 대문에 달린 금속 손잡이이다. 손잡이의 모양이 집집마다 달라서 하나하나 보면서 사용법을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대성당 앞에는 손잡이만 모아서 전시 판매하는 기념품 가게도 있다.

임디나가 지배계급이 살던 성내라면, 평민들이 살던 성외 마을의 이름은 라바트이다. 뜻은 아랍어로 근교라는 뜻이다. 라바트는 모로코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다. 라바트 역시 아랍 이슬람 지배의 흔적이자 몰타어에 남은 아랍어의 흔적이다.

라바트에는 사도 바울이 몰타에 상륙했을 때 전도를 했다는 지하 동굴과 그 위에 세운 성당이 있지만, 신심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메스키타 광장에서 마신 화이트와인으로 기분 좋은 취기가 올라서인지 일행들은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 바울이 전도한 곳을 가보는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바울이 전도한 것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천사의 말을 하고, 산을 옮기는 능력과 모든 지식을 알아도 정작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사도 바울이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라바트는 패스하고 발레타로 돌아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열린 버스 창문으로 들어오는 지중해 봄바람이 상쾌하다

●정연일

인생의 첫 사표를 던지고 인도로 떠난 1997년부터 현재까지 취미도 특기도 생업도 여행인 사람. 세계 100여 개국 이상을 여행했다. 유럽에서 가장 사랑하는 지역은 지중해 연안 국가.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제목에서 따온 닉네임 라스트라다 La Strada는 이탈리아어로 ‘길’이라는 뜻이다. ‘라정’이라는 별명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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