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행세에 당한 ‘억울한 자영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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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행세에 당한 ‘억울한 자영업자’
  • 박소담 기자
  • 승인 2024.02.28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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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선량한 소상공인 보호’ 시행… 고의성 없을 땐 행정처분 면제
미성년자들이 음식점에서 술과 음식을 먹은 뒤 돈을 내지 않고 도망가면서 남긴 메모. /자영업자 커뮤니티 ‘아프니까 사장이다’
미성년자들이 음식점에서 술과 음식을 먹은 뒤 돈을 내지 않고 도망가면서 남긴 메모. /자영업자 커뮤니티 ‘아프니까 사장이다’

“이미 다른 곳에서 술을 마시고 온 상태였다. 짙은 화장과 함께 내민 학생증을 믿었지만 남은 건 ‘미성년자다. 잘 먹고 간다’는 쪽지였다” 자영업자 커뮤니티 ‘아프니까 사장이다’에 올라온 한 음식점 사장의 말이다.

정부는 이처럼 청소년이 나이를 속여 술·담배를 구매하거나 숙박 시설을 이용했을 때 업주가 억울하게 행정처분을 받지 않도록 법령을 개정한다. 자영업자가 신분증 검사를 하는 등 ‘고의성’이 없는 경우 구제해주겠다는 것이 골자다.

청소년은 무죄, 업주는 유죄

청소년이 신분을 속이고 주류를 구매하려고 시도하다 적발된 건수는 상당하다. 지난해 10월 더불어민주당 인재근 의원이 17개 시도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년간 청소년에게 주류를 판매해 적발된 사례는 총 6959건이다. 하루 평균 약 6.4건이 적발된 셈이다.

청주 흥덕구에서 8년째 식당을 운영하는 김 모씨. 그는 지난해 연말, 미성년자에게 술을 판매해 적발됐다. 김씨는 “대학생들이나 젊은 층이 많은 동네도 아니고 주 고객층도 중장년층이다”라며 “20대인 아르바이트생이 보아도 40대인 내가 보아도 결코 미성년자로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씨에 따르면 이미 술을 많이 마시고 온 듯한 남녀 일행이 들어왔다. “진한 옷과 화장이며 테이블에 차 열쇠까지 올려놓기에 당연히 미성년자일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며 “나중에 알고 보니 미성년자였다. 몇만 원어치 매출 올리자고 미성년자한테 술을 팔 이유가 없다. 단골만으로도 이미 장사는 잘된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렇듯 판매자만 처벌받는다는 제도적 허점을 악용해 청소년들이 스스로 경찰에 신고하거나, 술값을 내지 않겠다며 업주에게 으름장을 놓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영업정지, 생계와 직결

미성년자인 것을 숨기고 주류를 주문한 손님으로 인해 업주와 직원들이 생계를 잃게 된 국밥 가게의 사연도 있다. 지난해 9월온라인 커뮤니티 ‘보배드림’에 ‘어느 가게의 안내문’이라는 제목의 게시글이 올라왔다. 게시글과 함께 게재된 현수막 사진에는 “작년 11월 거짓말을 하고서 처벌도 받지 않은 미성년자들 보아라. 너희들 덕분에 5명의 가장이 생계를 잃었다”며 구체적 상황이 설명돼 있다.

자영업자 커뮤니티인 ‘아프니까 사장이다’에 따르면 최근 주류를 포함해 16만 원어치를 먹고 “신고하면 영업정지인데 그냥 가겠다”라는 메모만 남기고 달아난 고등학생들도 있었다. 또 미성년자를 성인으로 착각해 술을 팔았다가 그 부모로부터 고소당해 영업정지, 과징금 등 처분으로 생계를 위협받고 있다는 사연도 공개돼 공분을 샀다.

영업정지를 당한 국밥 가게에 붙어있는 현수막. /보배드림
영업정지를 당한 국밥 가게에 붙어있는 현수막. /보배드림

현행법상 미성년자에게 주류나 담배를 판매한 경우 형사처벌은 물론 행정처분도 동시에 받게 된다. 청소년 보호법은 청소년에게 주류, 담배 등 유해 약물을 판매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특히 자영업자는 형사처벌과 별개로 영업정지 2개월 처분이나 영업소 폐쇄 명령을 받을 수도 있다.

이에 정부는 나이를 속여 술·담배를 구매한 청소년 때문에 선량한 소상공인·자영업자가 억울하게 피해 보지 않게 청소년보호·식품위생·담배사업법 등 관련 3법 시행령을 개정할 계획이다. 업주가 신분증을 확인한 사실이나 폭행·협박을 받은 사실이 폐쇄회로(CC)TV 등을 통해 확인된 경우 행정처분을 면제하고 과도한 현행 영업정지 기준도 개선하기로 했다. 1차 적발 시 영업정지 2개월에서 영업정지 7일 등으로 바꾼다.

정부, 고의성 따져 면제

중소벤처기업부, 여성가족부, 식품의약품안전처, 법제처 등 7개 중앙부처와 17개 광역자치단체는 지난달 15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선량한 소상공인 보호 관계기관 협의회’를 개최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민생토론회 이후 지방자치단체에 공문을 보내 청소년 주류 제공행위를 적발한 경우 자영업자의 신분확인 절차이행을 충분히 조사한 후 행정처분과 고발 여부를 신중히 결정하도록 요청했다.

현장의 적극 행정과 함께 규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법령 정비도 신속하게 추진하기로 했다. ‘청소년 보호법’ 소관 부처인 여성가족부를 비롯해 기획재정부와 식약처는 소관 법령에 포함된 청소년 신분확인 관련 규제 조문을 상반기 내에 개정할 방침이다. 이에 자영업자들은 “사장들도 미성년자에게 술 팔고 싶지 않다”, “위조한 신분증을 내미는 경우 판별이 어려운데 최소한의 방어장치가 생긴 것”, “이제라도 면책 조항을 만든다니 다행이다”등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다만 근본적인 대안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청주 서원구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배 모씨는 “기본적으로 미성년자 흡연과 음주 단속은 정부가 할 일”이라며 “무전취식을 하기 위해 고의로 신분을 속이는 청소년에 대한 처벌이 더 강해져야 한다”고 밝혔다. 한 편의점 점주는 “바로 2주 전 가짜 군번줄에 속아 지인이 담배를 팔다 적발됐다”며 “이미 피해를 본 자영업자들에 대한 구호 대책도 마련해달라”고 읍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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