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훈민정음》 해례본, 세계가 가치를 나누다
상태바
16. 《훈민정음》 해례본, 세계가 가치를 나누다
  • 김슬옹
  • 승인 2024.05.09 11: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계기록유산(MoW) 496개 중 으뜸, '한글 100대문화유산 1호'

유네스코는 1995년부터 전 세계에 있는 중요한 기록유산의 적절한 보존과 접근성 강화를 통해 세계인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목록화 사업을 시작했다. 인류의 다양한 기억을 보호하고 세계인이 공유하자는 취지로 사업의 정식명칭은 '세계의 기억(Memory of the World)'으로 영어 약칭으로는 'MoW'이다.

한국은 이 사업 명칭을 좀 더 명시적으로 ‘세계기록유산’으로 번역했다. ‘기록유산’이라고 해서 필기류 기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진과 음반 등의 매체 기록물도 포함된다.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에서 제공하는 자료(2023년 10월 기준)에 의하면, 등재기록유산 수는 모두 496개이다. 조선통신사 기록물은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했다. 이런 주체별 중복 합산을 하면 129개국, 9개 기구에서 모두 618개나 된다. 이 가운데 한국은 16개로 독일(23), 영국(23), 폴란드(17)에 이어 세계 4위이며 아시아에선 1위이다. 북한 1개(무예도보통지)를 합치면 17개로 폴란드와 공동 3위가 된다. 현재 준비 중인 등재 예상 기록물이 적지 않으므로, 머지않아 1위를 넘볼 것이다. 명실상부한 기록 대국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의 세계기록유산 16개 가운데 최초 등재물이 바로 1997년 10월 1일에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등재된 '훈민정음'이다. 현재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른바 ‘간송본’으로 불리는 66쪽 분량의 《훈민정음》해례본이다. 기록 중심 매개체인 문자에 관한 책이니 496개 세계기록유산 가운데 으뜸이라 할만하다.

해례본은 1446년에 간행된 지 494년만인 1940년에 발견되고 간송 전형필에 의해 안전하게 보존됨으로써 반포된 지 551년, 발견된 지 57년만인 1997년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세계기록유산 '으뜸'
훈민정음 1997년 등재

국내 평가로는 간행된 지 516년, 발견된 지 22년인 1962년에 대한민국 국보 70호로 지정되고, 2002년 '한글 100대문화유산 1호'로 지정되었다. 세계기록유산 선정 기준으로 보면 이 책의 가치는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세계기록유산 주요 기준은 첫 번째, 유산의 진본으로서의 ‘진정성’이다. 간송본(해례본)이 1446년에 간행된 초간본(원본)으로서 해례본의 내용과 관련 사실을 생생하게 기록한 세종실록 기록, 해례본 일부를 한글로 옮긴 언해본 등을 통해 책 집필자, 집필시기 등을 증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해례본 66쪽 가운데 앞의 4쪽은 진본이 아니지만, 진본으로서의 본질적 가치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그림> 간송본의 역사적 자리매김도

둘째, 독창적이고 대체할 수 없는 유산이어야 한다. 문자 자체가 독창적인 데다가 문자 창제자, 배경, 원리 등을 자세히 써 놓은 《훈민정음》해례본과 같은 책은 전 세계적으로 유일하다. 2008년도에 경상북도 상주에서 또 다른 원본이 배익기에 의해 발견되었으나 드러난 정황상 중요한 앞뒤 부분이 상당 부분 없고 남아 있는 것조차 소재파악이 안 돼 증명이 어렵다.

셋째는 세계적 가치로서 다섯 가지 측면에서 유산이 가지는 중요성이다. 

⑴ 시간 측면에서 해례본은 간행 시기와 발견 시점, 현재까지의 시간적 의미로 짚어볼 수 있다. 간행 때인 1446년은 철저한 신분제 사회로 양반과 일부 중인들만이 한자로 문자생활을 할 수 있었고 한자를 모르면 사람다운 대접을 받을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평민이나 천민까지도 문자생활이 가능한 길을 연 것이다. 1940년은 일제강점기의 폭압시대에 우리말과 글을 사용도 교육도 할 수 없던 시기였다. 그런 절망적인 암흑기에 해례본이 발견되어 우리 겨레의 또 다른 희망이 되었다.

⑵ 장소 측면에서 세계 역사와 문화의 발전에 중요한 이바지를 했던 특정 장소와 지역에 관한 주요한 정보를 담고 있어야 한다. 해례본은 책이어서 물리적인 장소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해례본 집필이 이루어진 경복궁의 집현전(전각 이름은 ‘수정전’)을 비롯한 주요 장소가 복원되어 있다.

⑶ 사람의 경우 전 세계 역사와 문화에 현저한 이바지를 했던 개인 및 사람들의 삶과 업적에 특별한 관련을 갖는 경우이어야 한다. 해례본의 대표집필자인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자이면서 32년간의 통치기간 각종 과학과 문화 발전을 이룩해 낸 인물이다.

⑷ 유산의 주제가 세계 역사와 문화의 중요한 주제를 구현하고 있는 경우이어야 한다. 인류에게 문자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사람은 문자를 통해 사람다운 세상을 열어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층민의 문자 소통이라는 가장 사람다운 뜻을 가진 것이 훈민정음 창제 반포였고 그런 맥락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 해례본이다.

⑸ 형태 및 스타일 측면에서 뛰어난 미적, 형식적, 언어적 가치를 가지거나 형태 및 스타일에서 중요한 표본이 된 경우이어야 한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15세기 책 편집과 출판의 가장 모범적인 전형을 보여준다. 임금과 신하의 공저 가치와 아름다움을 책에 그대로 반영하였으며 한문과 불경 편집 태도의 장점을 살려 편집의 이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해서는 보조요건 네 가지를 충족해야 한다. 첫째 희귀성이다. 독특하거나 희귀한 자료이어야 한다. 2008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발견된 것이 진본이라면 딱 두 권이 발견된 것이고 그것이 진본이 아니라면 유일본이 된다. 유일본이 아니더라도 1940년에 최초로 발견된 원본으로서의 역사적 가치는 변함이 없다.

둘째, 원 상태로의 보존이다. 온전한 하나의 전체로서 보존되어 있는 경우이다. 발견 당시 표지와 앞 두 장 모두 네 쪽이 없어진 상태이지만 전체로 보면 500년이 넘은 책으로서는 상태가 매우 좋은 편이다.

셋째 위협 측면에서 해당 유산이 각종 위험 요소에서 안전한가 또는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경비 조치가 적절한지의 여부이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1938년 미술관을 설립하고 일제 말기라는 어려운 시기에 각종 문화재를 보존하고 지켜 냈다. 6.25 참화 속에서도 대부분의 값진 유물을 지켜낸 것은 기적에 가깝다. 훈민정음 해례본도 지나친 비공개라고 일부 원망을 들을 정도로 간송미술관이 철저히 보존하는 길을 지켜 왔기에 지금까지 원본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한글은 최고의 '알파벳'
한국인의 문자를 넘어서

넷째 관리 계획이다. 해당 유산의 중요성에 비추어 적절한 보존 및 접근 전략의 존재 여부를 말한다. 1940년 매입 당시는 영인 대신 모사 방식으로 내용을 알게 해 원본도 비밀리에 지켜 내면서 전문가들에게 가치를 공유했고, 해방 후는 두 차례에 걸쳐 적절한 시기에 직접 영인을 하여 학술 대중화에 이바지했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은 가치 있는 문헌을 오래 보존하는 제일 나은 전략을 썼고, 원본의 적절한 보존을 하면서 그 가치를 나누기 위해 2015년과 2023년에는 원본과 똑같은 복간본을 만들어 국민과의 소통을 꾀하고 대신 원본은 더욱 철저히 보존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표> 세계기록유산 등재 요건(이승철 외, 2022,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워크북≫.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

정부는 《훈민정음》해례본을 2002년에 '한글 100대문화유산' 1호로 선정했다.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이 세계적 보편적 가치에 주목한 것이라면, 이는 세계문자 사상 유례가 없는 가장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문자로서 우리민족의 문화역량을 잘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라는 우리문화 특수성에 주목한 평가다.

한글 100대문화유산 사업 취지문에 의하면 문자는 문화 전반의 기반이 되기 때문에, 훌륭한 한글을 사용해 이루어진 우리의 문화유산 또한 매우 소중하며 영구히 보존하고 발전시킬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았고 해례본이 그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정된 문화유산들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 보급하여, 우리 국민들이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드높일 수 있도록 하고, 해외에서도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와 평가를 신장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역사가 존맨(John Man)은 2001년에 출간한 “ALPHA BETA : How 26 Letters Shaped”(The Western World, John Wiley & Sons. Inc)라는 책에서 “한글은 단순하고 효율적이며 알파벳의 대표적 전형이며, 알파벳이 발달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주는 최고의 알파벳이다.(116쪽)”라고 했다.(남경태 역, 2003, 《세상을 바꾼 문자 알파벳》, 예지 참조). 한글은 단순히 한국어를 적는 한국인만의 문자가 아니다. 훈민정음은 문자가 지향해야 할 보편 특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고 그 책은 그런 문자의 중요성을 담고 있으면서 중요성의 실현이 가능하게 하였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