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의 희망기업을 가다 ⑥ 이일화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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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희망기업을 가다 ⑥ 이일화학(주)
  • 오옥균 기자
  • 승인 2008.09.17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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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업사랑농촌사랑운동본부·충청리뷰 공동기획
‘시련,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2006년 대형화재에도 연매출 150억원 도약
기술력·신뢰 바탕으로 유가공 제품 용기 제작에 전념

   
2006년 10월 10일 청원군 내둔리, 플라스틱 용기 제조업체인 이일화학 1공장에 화재가 발생했다. 화마는 건물과 생산라인은 물론 생산제품까지 15억원(소방서 추산)의 재산을 삼켜버렸다. 어쩌면 그것이 이일화학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화재로 인한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었고 연매출 150억원을 바라보는 튼튼한 기업으로 여전히 성장 진행형이었다.

화재 당시 이일화학이 정상화될 것을 기대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된 상황에서 발주업체와 약속한 납품일자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납품기일을 맞추지 못하는 것은 납품업체로써는 치명적인 일이었으며 그것은 곧 도산을 의미했다. 하지만 15년간 한 우물을 판 이일화학은 보란 듯이 역경을 이겨냈다. 지난 15년간 이일화학이 업계에 보여준 신뢰와 기술력이 그 원동력이었다.

용기·마개·포장 한번에
이일화학은 플라스틱 용기를 만드는 업체 가운데 국내 최대 매출액을 올리는 기업이다. 그 가운데서도 국내에서 생산되는 유가공 제품에 대해서는 독점에 가까운 물량을 공급하고 있다. 남양유업, 서울우유, 매일유업, 롯데우유, 해태유업, 연세우유, 덴마크우유, 부산우유 등 국내 유가공 업체 전부가 이일화학에서 생산한 용기를 사용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플라스틱 용기 제조회사가 있음에도 이일화학이 이 같은 성과를 거두는 것은 유가공 제품을 담아내는 이일화학만이 기술력이 있기 때문이다.

기존 플라스틱 용기 시장은 용기와 마개, 포장필름을 각각의 업체에서 독립적으로 생산하는 시스템이었다. 이일화학은 이 같은 작업을 일원화함으로써 발주업체의 고민을 덜어주었다. 한창수 대표이사는 “예전엔 용기와 마개, 용기를 두르는 수축필름을 각각의 회사에서 생산하다보니 하자발생률도 높았고, 규격의 오차가 발생했을 때 잘잘못을 가려야하는 번거로움이 발주업체에 있었다. 하지만 일원화를 통해 클레임이 발생했을 때 즉각적인 대처가 가능해졌고 비용절감도 가져왔다”고 생산 일원화의 장점을 설명했다.

유가공제품 용기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문제가 마개와 용기입구 부분의 규격 불일치로 인한 누유현상이다. 이런 면에서 이일화학의 생산 일원화는 유가공 업체의 환영을 받았다. 여기에 최근에는 우유용기의 자동 라벨링 시설과 야구르트 슈링크(수축포장) 시설까지 갖춰 유가공 업체가 별도의 마무리 작업을 하지 않아도 제품만 담으면 바로 판매할 수 있는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국내 야쿠르트 포장용 수축필름 시장은 지난 10여 년간 1개 업체가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일화학이 수축포장 개발에 성공하면서 발주기업은 품질향상과 원가절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게 됐다. 동종업계에서 이일화학의 아성을 무너뜨리지 못하는 이유다.

이일화학이 연매출액 150억원대의 기업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이일화학을 덮친 위기는 화재만이 아니었다. 1997년 외환금융위기는 전도유망한 중소기업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내수침체에 따른 생산량 감소와 자금 압박으로 탄탄했던 중소기업들마저 줄줄이 도산했다. 이일화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일화학에는 이를 극복할 기술력이 있었다.

   

뚜껑의 일대변신 ‘봉인마개’

소비자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언제부터인가 플라스틱 용기의 뚜껑이 모두 봉인마개로 바뀌었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제품을 새것과 사용하던 것으로 구별하는 방법은 힘껏 마개를 돌려야 열리느냐 쉽게 열리느냐였다. 하지만 봉인마개는 한번 돌려 따면 그것으로 수명을 다한다. 봉인마개가 가져온 변화는 제품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다. 국내 플라스틱 용기에 봉인마개를 처음으로 도입한 기업이 이일화학이다. 흔히 봉인마개를 떠올릴 때 생수를 먼저 생각하지만 이일화학이 생산한 유가공 제품 용기에서 봉인마개 사용이 시작됐다.

94년 한재열 회장(당시 대표이사)은 미국에서 상용화된 봉인마개에 관심을 가졌고 봉인마개를 제작할 수 있는 기술력을 확보했다. 봉인마개는 이일화학이 IMF라는 태풍을 견딜 수 있게 만든 밑거름이었다. 94년부터 생산한 봉인마개는 그 이후로 5년간 이일화학을 지탱해주었다.

이일화학은 2006년 화재를 재도약의 기회로 삼았다. 화재로 위축될 수도 있었지만 4개월 전 설립한 청원군 장재리 4공장을 발판으로 잿더미가 된 1공장을 더욱 큰 규모로 확장 신축했다. 또한 지난 2007년 4월에는 공주에 5공장을 설립했다.

기존의 생산제품에 PET용기, 스트로우 등을 추가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유가공 제품 용기에 관한 모든 제품이 생산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매출액 40억원이 증가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창수 대표이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명가의 장인정신으로 최고 품질의 상품과 파트너십을 통해 최고로 거듭날 것이다. 질 높고 저렴하면서도 만족스러운 제품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최근에는 국제유가 상승으로 인한 원자재 값 상승으로 또다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IMF와 화재의 충격을 딛고 일어선 경험이 있는 이일화학이다. ‘제2의 창업, 제2의 도약’을 기치로 다시 뛰는 이일화학의 행보가 주목되는 이유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이일화학(주) 한재열 회장

   
한재열 회장(59)은 “화재 당시 모든 것이 불탔지만 다행히 제품생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금형만은 온전했다. 금형마저 불탔다면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일화학이 보유하고 있는 금형은 다른 업체의 것으로 대체할 수도 없는 이일화학만의 기술이었다.

그는 ‘운이 좋았다’라고 치부하지만 회사가 어려울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기 때문에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IMF가 그렇고, 화재가 발생했을 때가 그랬다. 뚝심으로 밀어붙였고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1981년 세창프라스틱을 설립한 한 회장은 1992년 고향인 청주로 내려와 이일화학을 설립했다. 설립자금 10억원과 10여명의 직원으로 시작한 이일화학은 2008년 현재 100억원의 자산을 보유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5곳 공장에서 제품이 생산되고 있고, 자동화 생산 시스템 하에서도 60여명의 직원이 종사할 정도로 규모를 갖췄다.

한 회장은 이일화학이 이만큼 성장한 것에 대해 ‘부단히 노력한 결과’라고 말했다. 그가 좋아하는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문구처럼 자신의 일을 성실히 하지 않고 요행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했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가 지금의 이일화학을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직원을 대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한 회장은 “내가 그랬듯 직원들도 그렇길 바란다. 최선을 다하고 결과가 좋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탓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근 원자재 값이 2배 이상 폭등해 매출액은 증가해도 수익은 감소하는 상황이지만 한 회장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최고의 품질과 사람중심의 경영으로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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