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사도세자 능 참배하러 가기 위해 가설
창덕궁 홍예교와 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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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사도세자 능 참배하러 가기 위해 가설
창덕궁 홍예교와 유사
  • 충청리뷰
  • 승인 2003.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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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건설박물관 손광섭 관장의 탐사연재 ‘세상의 통로 ‘橋梁’을 찾아서’ 22 만안교

만안교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679번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곳 석수동은 삼성천 주변의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석공이 많이 산다하여 석수동(石手洞)으로 불려졌다. 1930년대 초 마을앞에 석수동 수영장이 생기면서 석공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그때부터 석수동(石水洞)으로 불려지고 있다. 만안교와 만안교비도 이 석공들에 의해 만들어 졌다고 한다.

만안교의 원 위치는 남쪽으로 200m지점이었으나 1980년 8월 국도확장공사로 인하여 현 위치로 옮겨 세운 것이다. 이다리는 조선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러 가기 위하여 가설한 다리로 정조 19년(1795)에 건립되었다. 정조는 효성이 지극하여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 화산(華山)으로 이장한 뒤 자주 능을 참배하며 원혼을 위로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러 가는 정조의 참배행렬은 대단하였는데 그 행렬이 편히 건너가도록 축조한 다리이다.

당시 정조의 참배행렬은 궁궐을 떠나 노량진→과천→수원을 거치는 것이 빠른 길이었으나 그 길가에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개입해서, 정조가 원망하는 김상로(金尙魯)의 형 김약로(金若魯) 묘가 있었다. 이런 까닭에 시흥 수원쪽으로 행로를 택하면 안양천을 경유하게 되므로 만안교를 축조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나무로 다리를 놓아 왕의 행렬이 건너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왕의 행렬이 편안하게 다리를 건너지 못하게 되자 당시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徐龍輔)가 돌로 이를 대체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1795년 경기도 관찰사 서유방이 왕명을 받들어 3개월의 공역 끝에 다리를 완성하였다. 만안교 축조공사에는 경기도 관찰사.병마수군절도사.수원유수.개성유수.강화유수 등이 동원되어 건립될 정도로 많은 공력을 기울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금천현조(衿川縣條)를 보면 “만안교는 남쪽으로 10리에 있는데 안양천에서 수원으로 통하는 대로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만안교는 안양교라는 다리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부터 다리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이후에 안양교를 새롭게 건설하면서 만안교라고 하였으며, 안양교(安養橋)라고도 불리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안교는 조선 후기에 축조된 대표적인 홍예식 다리로 7개의 홍예식 수문을 만들어 물이 빠져나가도록 정교하게 축조되었다. 현재 서울 중랑천에 남아있는 조선 성종 14년(1483)에 완성된 살곶이다리와는 다르게 정교한 홍예식 수문을 만들었다. 다리의 축조기술이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석교보다는 발달된 토목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교량은 길이 34.8m, 폭 7.8m로 당시 토목기술로는 상당한 규모의 석교였다. 물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데 물이 흐르는 북쪽 바닥에는 다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장대석형의 바닥돌을 깔았다. 홍예를 세우기 위하여 바닥에는 규모가 큰 기반석(基盤石)을 놓았다. 특히 물이 흘러들어오는 북쪽에는 앞부분이 삼각형 형태로 돌출시켜 물의 흐름이 원활하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기반석은 토사로 인하여 10~20cm정도만 노출되어 있다. 홍예식 수구는 중앙을 제일 크게 하고 양쪽으로 갈수록 좁게 고안하였다.

중앙 홍예는 홍예돌 11석을 활용하여 강한 힘을 받을 수 있도록 정교하게 치석하여 결구하였다. 전체적인 다리의 축조수법이 창덕궁에 있는 홍예교와 유사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축조수법이 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임을 알 수 있다.

만안교지는 현재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864-2에 만안교가 있는 남쪽으로 200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만안교의 원래 위치는 만안로에서 안양유원지로 들어가는 입구 사거리 교차지점 북쪽길이었는데 현재는 지하차도 인근으로 우측에 삼양펄프라는 공장 부지로 변하였다.

만안교비는 삼양펄프로 들어가는 정문 우측 담이 있는 구석에 서 있었다고 한다. 만안교가 1980년 8월 도로확장공사로 이전하면서 도로가 되었고, 물길도 다른 방향으로 돌려져서 만안교지를 찾기는 어렵다.

만안교비는 1980년 국도확장공사로 만안교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될 때 같이 옮겨온 석비로 만안교 건립을 기념하기 위한 사적비(事蹟碑)이다.

만안교비는 귀부와 비신, 가첨석을 갖춘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석비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석비의 전체 높이는 311m이며, 비신의 규모는 165×65×33cm이다. 구부(龜趺)는 한돌로 마련하였는데 판석형 2매의 지대석을 놓고 올려 놓았다. 하부에는 다시 높이 15cm정도의 받침을 귀부의 형태에 따라 마련하였다. 귀부는 발가락이 4조(爪)인 다리를 웅크리고 앉아있는 형태이며, 꼬리는 짧고 오른쪽으로 휘어져 있다. 귀갑은 무늬가 없지만 귀갑 위를 다시 꽃무늬 형태로 돌리고 모서리 부분을 오메가형으로 장식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구두(龜頭)부분인데, 목에 비늘이 있고 약하게 견갑이 표현되어 있으며 뿔형의 귀를 달았다. 머리 위에는 길게 날개형으로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있으며, 도깨비와 같이 불쑥 튀어나온 눈과 양쪽으로 나온 이빨, 둥글게 과장된 코등은 조선후기가 되면서 다양한 형태로 변화되는 귀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거북이나 용의 머리가 아닌 상상의 동물을 과장되게 표현하여 비신을 사악한 것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의미를 강하게 상징화시켜 놓았다.

비신은 전면인 동쪽면에 “만안교(萬安橋)”라고 음각되어 있으며, 각자된 글씨 안에는 붉은색 칠이 되어있다. 후면에는 만안교의 공적과 관련된 내용들이 음각되어있고, 측면에는 만안교 건립연월일과 축조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있다. 비신 상단부는 파손이 심하여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비문의 주요 내용은 화성으로 가는 도중에 안양천이 있으므로 석교의 필요성을 느낀 신하가 공사 착수 3개월만에 준공하자 정조가 만안교(萬安橋)라는 이름을 내렸다는 것이다. 만안교라고 다리이름을 정한 것에 대해서는 “왕의 어가가 방울을 울리며 편안히 다녀오기를 만년을 한결같이 기원할 때 하천에서 다리에 쓰일 돌들이 나와 경비를 절감하여 신이 도왔으며, 만년을 만안하고 천년만년 편안하기 반석과 같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갑문(閘門)이 5개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갑문이 실제로 7개였던 것으로 보아 오기로 보인다. 비문은 경기도 관찰사 서유방(徐有坊)이 글을 짓고 조윤형(曺允亨)이 썻으며, 전면의 글씨는 유한지(兪漢芝)가 썻음을 알수 있다. 비신의 상부는 팔작지붕을 번안한 가첨석을 올려 놓았는데, 마루 부분을 높게 하여 마무리 하였다. 가첨석도 귀부와 같이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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