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천 한내 돌다리, 보령과 남포간을 잇던 한양 길목 12칸 돌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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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 한내 돌다리, 보령과 남포간을 잇던 한양 길목 12칸 돌다리
  • 충청리뷰
  • 승인 2003.08.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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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건설박물관 손광섭 관장의 탐사연재 ‘세상의 통로 ‘橋梁’을 찾아서’

조서산(鳥棲山)과 백월산(白月山)에서 발원(發源)하여 서남향으로 대천시내를 관통하여 서해로 들어가는 길이 18km의 대천천(大川川)하류에 있었던 다리로, 조선시대 남포(藍浦).비인(庇仁).서천지역의 한양 길목 12간 돌다리이며, 남포와 보령을 잇는 주요 교통로였다. 이 내는 대천의 서부해안평야를 가로질러 감으로 옛날에는 두 지역의 교통에 커다란 방해가 되었던 강이다.

高麗 顯宗(고려 현종) 3년(1012) 하청부곡을 두었는데 조선세종 14년(1432) 하청면을 두었고 영조 45년(1769) 방리(坊里)개편으로 하청방이었으며, 고종26년(1889) 하청과 하구리로 나뉘었다가 동32년(1895) 다시 하청리에 합치고 1915년 6월 1 일 법정리가 되었으며 1942년 5월 1일 부락구제로 서리,중리,창동,성동,의 4구였다가 1961년 10월1일 행정리가 되고 그후 신동과 신창이 신설되어 6개 행정리가 되었다.

서리(西里)마을 본래 건너청 또는 건너 하청이라 하였으며 하청의 서남쪽에 위치하니 서리라 하였다. 하청의 북쪽에 위치하여 본래 잿골 또는 짝골이라 하였는데 용등산과 녹감산에 둘러쌓여 성안 같다하여 성동이라 하였다.

성동에서 바다 쪽으로 흐르는 큰 내를 한내라 하고 건너는 다리를 고종(高宗) 26年(1889) 하구리(河龜里) 다리라 하며, 1992년 8월 17일에 유형 문화재 139호로 지정되어 보령시에서 관리하고 있는 석조 다리이다.

다리가 있었던 곳은 대천천(大川川) 하류 철교의 상류쪽 50m지점으로, 옛날 하중도의 말단부에 해당하며, 일제시대 초기까지 주교통로로 이용되었다. 다리의 규모는 폭 2.38m, 길이 50여m, 12간(間)으로 전한다. 1991년에는 27m정도가 남아 있었는데, 이 길이는 현재 하천폭의 1/4에 해당하는 길이다. 지금은 물살에 쓸려 유실되거나 하천 제방공사를 할 때 파손되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이것을 현장에서 수습하거나 또는 파손을 염려하여 1976년 읍장(邑長) 이하 전 직원이 대천 읍사무소로 옮겨 보존하다가 일부만 대천천 강변에 옮겨 1992년 12월에 복원하였다.

석재(石材)는 왕대산(王大山) 근처에서 채석한 화강으로, 왕대산에서 돌을 깎아내어 뗏목으로 조류(潮流)의 흐름을 이용하여 상류로 운반해온 것으로 보인다. 다리의 몸체를 받치는 기둥은 거칠게 손질한 2~3개의 돌을 쌓아 이루게 하여 모두 6개의 기둥이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 위로 넓적한 판돌을 걸쳐서 다리를 완성하였는데, 원래는 12칸 돌다리라 하나 적어도 22칸은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남아있던 석재를 가지고 현장조사를 통하여 다리를 살펴보면 교각(橋脚)은 별다른 기초없이 두께 30~40cm, 길이 60~300cm 정도의 거칠게 손질한 장대석(長臺石)을 2~3단 쌓았고 그 위에 이것과 직각방향으로 길이 180~450cm내외, 두께 35cm의 장대석을 걸쳐서 답판(踏板)을 만들었다.

현재 남아있던 교각은 가장 높게 남아 있는 곳을 기준으로 하면 120cm인데 이 위에 두께 35cm의 시렁돌(다리의 바닥면에 깔았던 돌)을 얹으면 강바닥에서 약 145cm정도의 높이이고 해발 590cm내외이다. 이 높이는 바닷물이 밀려 오거나 상류에 홍수가 질 때면 물에 잠기는 높이이며 보통때도 교각이 물에 잠기는 아주 낮은 다리로,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바닷물이 들어 올때는 돌다리의 시렁돌 위에까지 넘쳐 미끄럽고 위험했다고 한다.

교각의 거리는 135~500cm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다리의 폭은 3개의 장대석으로 복원해 보면 170~220cm정도이다. 또 한쪽에서는 잘 다듬은 사각기둥(140×57×59cm)이 있어 여러 차례 보수해서 사용한 것 같고 어느 때는 교각이나 다리의 난간 등에 사각기둥을 썼던 때도 있었던 듯하나 지금은 그런 석재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12칸 돌다리라고 전해지지만 가장 긴 시렁돌(454m)을 기준으로 해도 다리의 칸수는 22칸이 되어야 하니 더 많았을 것이다.

17세기의 기록인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 현의 남쪽 20리에 대천교(大川橋)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신안현지(新案縣誌)(1748)나 여지도서(輿地圖書)(1760)에는 위치와 석교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다리는 보령과 남포간의 빈번한 교통을 고려하면 조선초기부터 있었던 듯하나 기록으로 보아 돌다리는 18세기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1910년대의 지도에 보면 돌다리 아래쪽 100m되는 지점에 나무다리가 나타나고 있어 이때는 돌다리의 기능이 없어진 듯하다.

이곳 보령에서는 해마다 향토문화축제가 열리는데 이때 12칸 돌다리밟기제(祭)와 돌다리밟기에 많은 시민이 참여하고 있다

 보령 머드 축제 각광

보령시는 예로부터 자원이 풍부하고 산 좋고 물 맑아 산자수명한 땅에 대대손손 평강을 누리며 산다하여 萬世保寧이라 불리던 축복 받은 고장이다. 96년 7월 대천해수욕장 인근 청정개펄에서 채취한 양질의 바다진흙을 가공하여 머드팩외 9종의 화장품을 개발하였다. 보령산은 인체에 유익한 원적외선이 다량 방출되고, 외국산 제품에 비하여 게르마늄, 미네랄, 벤토나이트 성분함량이 높아 피부미용에 탁월한 효과가 있음이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한국화학연구소, 태평양기술연구원, 원광대 김재백 박사팀등 국내 유수연구기관으로부터 입증 되었으며 2001년도에 ISO 9002 인증획득을 하였다.

따라서 보령머드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상품화로 성공한 「보령머드화장품」과 대천해수욕장을 비롯한 각종 관광명소를 홍보코자 ‘98년 7월에 처음으로 축제를 개최하였고, 금년까지 6회 연속하여 문화관광부 지정축제로 선정되었으며, 특히 29개 지정축제에서 23개 지정축제 축소운영됨에도 우수축제로 한단계 상승 지정되는등 세계적인 축제로 육성해 나가고 있다.

보령머드축제는 동양에서 유일한 패각분 백사장을 자랑하는 대천해수욕장에서 개최로 해수욕 및 청정개펄에서 진흙을 채취하여 각종불순물을 제거하는 가공과정을 거쳐 생산된 머드분말(mud powder)을 이용한 머드마사지등 동시에 체험을 할 수 있는 축제이다.

특히 제5회때 호응도가 높은 해변셀프마사지를 대폭 확대 운영하여 넓게 펼쳐진 백사장을 까맣게 수놓은 듯 한 것이 인상적이며 효과만점이라 하겠다. 또한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현장 체험을 높이기 위해 인근 해안도로변의 갯벌에서 직접 갯벌극기 훈련과 제1회 갯벌하프단축마라톤 경주를 개최 운영하고 머드를 소재로 개발한 칼라 머드바디페인팅공연과 바디페인팅코너 운영으로 해변에서만 느낄수 있는 멋진 참여 프로그램으로 추억을 만들어 돌아 갈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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