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제, 우리나라 미풍양속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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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 우리나라 미풍양속 아니다”
  • 홍강희 기자
  • 승인 2003.08.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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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지숙 호주제폐지충북시민연대 공동대표

호주제 폐지가 한걸음 다가왔다. 법무부는 지난 22일 “호주를 중심으로한 현행 호적 대신 개개인의 신분을 등록하는 개인별 신분등록제 도입을 뼈대로 한 민법개정안을 입법예고할 계획”이라고 전제하고 “자녀의 성과 본은 아버지의 성을 원칙으로 하되 부부가 합의하면 어머니의 성을 따르거나, 이혼·재혼 가정의 자녀들은 가정법원 결정에 따라 새 아버지나 어머니의 성으로 바꿀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굳건하게 버티던 호주제가 드디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성계에서는 한나라당이 호주제 유지를 당론으로 정한데다 국회 법사위 위원들 상당수가 찬성이냐 반대냐 의견을 밝히지 않아 ‘호주제 폐지’라는 목적을 실현할 수 있을까 걱정이다. 그럼에도 여성계에서는 대대적인 집회를 기획하고 국회의원 설득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충북지역에서는 일찌감치 ‘호주제폐지충북시민연대’를 꾸리고 서명작업, 토론회 개최, 국회의원 의견조사, 호주제폐지를 원하는 충북남성 850인 선언 등을 해오며 호주제의 폐해를 알려왔다. 변지숙 호주제폐지충북시민연대 공동대표를 만나 그간의 과정을 들어본다.

-그동안 호주제 폐지를 줄기차게 외쳐 왔는데, 여성계에서는 정부 발표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정부의 호주제 폐지 의지에는 일단 환영하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심정적으로는 ‘호주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하면서 답변은 ‘유보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청주지역 국회의원들도 마찬가지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눈치를 보는 것 같다. 그리고 여성계에서는 당초 민법개정안에 ‘아버지의 성을 원칙으로 한다’는 조항을 넣는 것에 반대했으나 사회정서를 고려해 이 부분을 양보키로 했다. 그래서 아주 흡족하지는 않다는 반응들이다.”

- 호주제를 반드시 폐지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달라.
“우리는 양성평등을 가로막는 가장 큰 원인이 호주제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것을 없애지 않으면 남녀평등은 헛구호에 불과하다. 아들 우선의 호주승계로 부계혈통만이 인정돼 3살짜리 손자가 70세 할머니의 주인이 되는 게 말이 되는가. 집안의 대가 끊어져서는 안된다는 관념아래 벌어지는 여아낙태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고, 한부모 및 재혼가정이 날로 늘어가는데도 부의 성을 강제로 따르도록 돼있는 점, 호주제가 일제 잔재라는 점 등이 호주제를 폐지해야 하는 이유들이다. 21세기는 상호존중과 수평적인 네트워크의 시대인데 아직도 뿌리깊은 가부장문화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은 상당한 모순이다.”

- 보통 사람들은 호주제가 우리나라 전통문화에서 나온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게 문제다. 호주제는 일제가 국민통제수단으로 만든 제도에 불과한데도 대부분 미풍양속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

- 호주제폐지를 거부하는 쪽에서는 호주제가 없어지면 가정이 붕괴되고, 근친간 결혼이 생길 것이라고 우려하는데…
“말도 안되는 얘기다. 상식이 있는 사람들도 호주제가 폐지되면 당장 나라가 망하고, 뿌리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가족관계가 와해된다고 하는데 호주제가 없는 나라도 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설사 일어나더라도 호주제의 유무와는 관계가 없다. 호주제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 존재한다. 호주제가 폐지되더라도 이를 대신할 개인별 신분등록방식이 있어 근친결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姓)에 대해 혼란이 올 것이라고 걱정하는데, 아버지의 성을 기본으로 쓰되 필요할 때만 가정법원의 허가를 얻어 어머니 성으로 바꾸도록 돼있어 역시 문제가 안된다.”
이 말 끝에 그는 호주제에 대해 몰라서 반대하는 사람들과 부딪칠 때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대중적인 교육을 못 한 점이 못내 아쉽다는 것.

- 그래도 주무 부서인 여성부는 안재헌 차관을 위원장으로 한 ‘호주제폐지추진기획단’을 만들어 열심히 뛴 것으로 알고 있다.
“호주제 폐지는 좋은 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에 나온 말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런 성과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줄 알고 있지만, 그동안 여성계가 10여년 동안 지난한 싸움을 벌여온 결과물이다. 호주제 폐지 열망이 높자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공약으로 채택했고,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걸음 내딛은 것이다.”

한편 변지숙 대표는 ‘호주제폐지충북시민연대’의 활동이 다른 어느 지역 단체보다 활발히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상당공원 옆에 내걸었던 ‘호주제폐지를 원하는 남성 850인 선언’도 매우 빠른 시간내 많은 사람들로부터 서명을 받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청주시내 한복판에 이 플래카드가 걸렸을 때 보수적이기로 이름난 충청도 남자들은 한마디로 ‘쇼크를 먹었다’고 표현했다. 과거 가족법 개정이 진보적인 여성들의 줄기찬 싸움 끝에 이루어졌던 것처럼 호주제 역시 언젠가는 폐지될 것으로 여성계는 보고 있다. 다만 그 시기를 앞당겨야 한다는 것이 과제일 뿐이다.
무엇이든 처음에는 ‘계란으로 바위치기’ 지만, 그 바위가 흔들리다 결국에는 넘어지고 마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본다. 변 대표도 “운동은 ‘될 것’이라기 보다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하는데 사회 전반적으로 개혁의지가 강해 희망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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