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표적 교량 유적, 서원 8경 가운데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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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표적 교량 유적, 서원 8경 가운데 하나
  • 충청리뷰
  • 승인 2003.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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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건설박물관 손광섭 관장의 통로를 찾아서-청주남석교

남문로 1가에서 석교동 사이 도로에 매몰
고려견은 청주대내 용암사 경내에 보관 중 

청주읍성 밖 남쪽의 부강로(芙江路)에 있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 현재는 남문로 1가에서 석교동에 이르는 도로상에 매몰되어 있다. 다리의 길이는 64m, 너비는 4m에 이른다. 다리의 제원이 기록물마다 조금씩 다른데 대체로 이 치수가 정확하다. 돌다리의 길이로만 따진다면 서울 성동구, 한양대앞의 ‘살곶이다리“가 70m로 제일 길고 남석교가 그 다음이다.

건조년대에 관하여 대태춘봉(大態春峰)의 “청주연혁지(淸州沿革誌)”에 의하면 한(漢)선제(宣帝) 오봉원년(五鳳元年)(B.C57, 신라박혁거세 즉위년)이라 하였고, 충남 청양(靑陽) 조응현저(趙應顯著) 하주당시교(荷珠堂時橋)(1894)중에는 남석교의 건조를 한(漢)선제(宣帝) 오봉원년이라 하였으며. 오봉원년(五鳳元年)이란 기명(記銘)이 팔분(八分) 내지(乃至) 예서(隸書)로 새겨져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남석교위에 돌로 만든 법수2기 고려견은 높이 1.6m의 석주위에 견상을 조각한 것으로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고려견은 남석교 양쪽에 있었으나 2쌍중 한쌍만이 우암산 아래 청주대학교 내 용암사 경내로 옮겨져 보관중에 있으며 남석교가 발굴될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철종 6년(1855)경의 주목(州牧) 안연탁이 재임중(在任中) 남석교를 개건하고 남석교사적비(南石橋事蹟碑)를 세웠다는 기록이 주목조(主牧條)에 보이나 비(碑)는 유실되어 알길이 없다.

남석교는 화강암(花崗巖)2층으로 놓았는데 한국식 대청마루를 놓듯 돌의 널판을 장방형(長方形)으로 만들어 양편에 이어 놓았다. 옛날부터 청주에서는 구정월(舊正月)14일 이른 저녁을 해먹고 나와서 다리를 자기의 나이대로 왔다갔다하며 밟으면 그 해는 다리의 힘에 신효(神效)를 얻는다는 풍습이 예부터 있었다. 남녀간의 내외가 심했고 처녀와 가정부인들은 나들이하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이날 저녁만은 밖에 나와 뭇 사람들 사이에 끼어 다리를 밟았다.

건조년대를 추정키는 어려우나 문헌(文獻)에 의하면 哲宗年問(1855)에 개건(改建)하였다고 하였듯이 석교(石橋)의 원형(原形)이 보존(保存)된 것이 아니고 수차 개수(改修) 또는 개조(改造) 하였음을 추측(推測)케 한다.

남석교엔 얽힌 유물전설 세가지가 전해져 내려 오고 있다.먼저, 옛날 이곳에서 홀어미가 두 남매를 키우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남매가 모두 장사여서 힘겨루기에 따른 불화가 잦았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생사를 건 남매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제한된 시간에 맞춰 누이는 우암산에 올라 성을 쌓기로, 아들은 지금의 무심천에 돌다리를 놓기로 한것이었다. 힘겨루기를 시작한지 며칠 후, 어머니가 상황을 살펴보니 성은 이미 완성이 되어 가고 있는데, 돌을 나르러 간 아들은 영영 돌아올 줄 몰랐다. 영락없이 아들이 죽게 될 상황이었다. 그래도 홀어미는 아들만큼은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가마솥에 팥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팥죽이 다 끓을즈음 홀어미가 “시장도 하고 힘이 들 터이니. 또 아들녀석이 돌아오려면 아직 멀었으니 팥죽이나 먹고 천천히 하거라”며 누이를 만류했다. 이렇게 누이가 팥죽을 천천히 식혀 먹고 있는 동안에, 한편 아들은 부지런히 돌을 날라 다리를 완성하였다. 결국 힘겨루기에 패한 누이는 성 위에 올라 몸을 던져 자결했고, 부질없는 불화로 누이를 잃게 된 동생은 그 길로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홀어미도 자식의 불화를 진정시키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누이가 쌓은 성이 오늘날의 상당산성이며, 아들이 만든 다리가 남석교다.

두 번째 이야기는, 옛날 한선사가 이곳을 지나다 진정원(盡情院)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그런데 그 날밤 건너온 돌다리에서 불현 듯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선사가 놀라 돌다리의 형국을 자세히 살펴보니, 끝내 땅에 묻혀 한 간(間)이 부러질 운명이었다. 더구나 돌다리의 운명이 국운과 맞닿아 있으며 또한 언젠가는 다시 세상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할 수 있었다. 다음날, 선사는 이후 돌다리가 그 모습을 드러낼 때 부러진 한간을 대신할 재목만큼은 자신이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못내 가던 발길을 떼지 못하였다. 그래서 며칠을 더 머물면서 재목이 될만한 반석을 두루 찾아 헤맸고, 드디어 동막골 인근에서 은은한 빛이 서려있는 재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선사는 이내 그 돌을 뽑아 거꾸로 세워놓고 이후 부러진 한 간을 대신한 재목이라는 표식을 해두었다. 실제로 1932년 도시개발계획이라는 명분하에 다리가 매몰되었고, 1950년 6.25전란 중 탱크에 의해 한 간(間)이 부러졌으며, 오늘날 일부에서 발굴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세번째는, 신라 서원경(西原京)이 설치되었던 시기 남천(南川)이남 지역의 부민(府民)들은 외나무다리를 건너야만 문안으로 장을 보러갈 수 있었다. 그러더 어느 날 어린 자식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던 한 과수가 시주를 하러 온 대원사(大元寺) 수행승에게 “스님 반나절만 우리 애를 맡아 주십시오. 남천을 건너 장을 봐야 하는데 아이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라며 부탁을 하였다. 이에 수행승은 흔쾌히 허락하고 아이를 맡았다. 그런데 수행승이 잠깐 낮잠을 자는 사이에, 멀리 오는 어미를 발견한 아이가 남천 외나무다리를 건너다 그만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쓸려가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에 이 광경을 목격한 과수는 크게 슬퍼하며 시체를 건져 화장하고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머리를 깎고 비구가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대원사 주지는 수행승의 소홀로 말미암은 큰 불행을 송구스럽게 여겨, 외나무다리를 철거하고 대신 그 자리에 튼튼한 다리를 놓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가까운 고을에 있는 수행승들을 모두 동원하여 동쪽 선도산(仙到山) 기슭에 장막을 치고 돌을 다듬어 남천으로 운반하는 다리 역사가 크게 벌어졌다. 밤낮으로 돌깨는 소리와 어린 영혼을 달래는 진혼경(鎭魂經)소리가 계속되는 가운데 다리 역사는 근 석 달이나 계속되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돌로만 조립된 웅장하고 견고한 돌다리가 남천에 놓이게 되었다.

남석교는 청주 도시발전의 상징적 구조물이며, 그 형태와 규모에 있어 우리나라의대표적인 교량유적이다. 또한 남석교는 그 자체의 풍광으로 서원8경 가운데 하나였으며, 이곳에서 매년 정월 보름에 행하던 답교놀이는 청주의 대표적인 세시풍속이었다. 이러한 남석교가 현재 육거리 시장의 도로 밑에서 잠자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남석교의 발굴과 복원이 이루어져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 청주의 명소로 거듭 태어날지 기다려지는 것은 필자만의 염원이 아니고 청주시민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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