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년 맞은 참여연대 이끄는 백수의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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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년 맞은 참여연대 이끄는 백수의 청년
  • 이재표 기자
  • 승인 2009.06.10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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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재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공동대표

일요일(7일) 저녁, 이날 하루 1만2700보를 걸어온 ‘백수(白首)의 청년’을 청주의료원 인근 장수복집에서 만났다. ‘청주 삼백리 무심천 답사대’의 일원으로 매달 첫째 주 일요일마다 무심천을 따라 걷고 있는 강태재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공동대표였다.

강 대표는 “일행들과 함께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에서 금거리까지 무심천을 따라 6시간여를 걸었는데 만보계로 1만2700보가 나오더라”며 “다음 달 답사 때에는 무심천 발원지 3곳 가운데 하나인 내암리 계곡에 도달한다”고 밝혔다. 성성한 백발을 보면 60대 중반이라는 나이를 가늠할 수 있지만 꼬장꼬장한 눈빛과 카랑카랑한 음성에서는 젊은 시대정신이 배어나왔다.

5월28일 청주 상당공원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제에서도 웅변조로 터져 나온 강 대표의 추모사는 두드러졌다. “추모제인 만큼 ‘차분하게 읽어야지’하고 몇 번을 되뇌이고 단상에 올라갔지만 눈앞에 펼쳐진 수천 개의 촛불을 보자 마음속에서 격랑이 일었다”는 게 그날의 소회다.

강 대표는 지금의 활약상에 비춰보면 늦깎이 시민운동가다. 특유의 달변과 필력으로 지역의 언론매체를 통해 일찌감치 이름을 날렸지만 2004년 지역경제연구소장으로 정년퇴임하기까지 청장년 시절 24년을 청주상공회의소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냈다. 그래서 참여연대와 함께한 10년 동안 그가 더 열정적으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강 대표는 “참여연대 20년사 원고의 교정을 보느라 밤을 새기 일쑤다. 교정을 보는 것도 힘든데 쓰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겠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라고 말했다. 강 대표는 또 “원고 교정 덕에 참여연대의 지나온 발자취를 더듬을 수 있게 됐다”며 “충북참여차지시민연대가 꿋꿋이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힘은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해 그때그때 지역의 현안과 시대적 요구에 부응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강 대표는 이에 대해 “이름의 변천사만 봐도 참여연대가 어떻게 변모해왔는지를 알 수 있다”며 20년사를 한숨에 정리했다. 1989년 참여연대가 탄생할 당시의 아명(兒名)은 ‘충북시민회’였다.

강 대표는 “80년대를 뜨겁게 살아온 젊은 민주화운동세력들이 정치투쟁에서 지역문제로 시선을 돌려 지역의 양심적인 중진, 원로들과 연합해 만든 단체가 충북시민회다. ‘철당간 보존, 고속철 유치, 수험생 민박’ 등 아주 현실적인 구호를 내걸었지만 그 당시 이미 ‘지방자치, 균형발전’과 같은 가치에 주목했다는 것이 놀랍다”고 말했다.

강 대표는 또 “이후 NGO시대가 열리고 지방자치가 부활하면서 청주시민회로 이름을 바꾸는데, 이는 풀뿌리민주주의에 천착하기 위해 단체의 활동기반이 청주임을 선언한 것이다. 1995년 공명선거운동에 이어 2000년 낙천낙선운동을 거치면서 전국단위 조직으로 탄생한 참여연대와 연대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소주잔을 기울이며 두 시간여 걸쳐 진행된 이날의 메뉴는 ‘복 샤브샤브’였는데, 복 껍질과 뼈를 우린 국물에 두툼한 복어 살을 살짝살짝 데쳐먹는 맛은 담백함 그 자체였다. 껍질무침과 대구머리 튀김, 공깃밥 분량의 무쇠 솥 밥도 입에 착착 달라붙었다.  

강 대표는 “온 가족이 좋아하는 집이다. 생일 같은 기념일에는 으레 회식을 하는 줄 알고 있다. 딸이든 아들이든 스스럼없이 술잔을 기울이는 게 우리 집의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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