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달력을 거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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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달력을 거는 날
  • 충북인뉴스
  • 승인 2009.12.30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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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시인
먼 옛날 북방의 수(戍)자리를 맞바꾸거나
별똥별과 새별이 은근슬쩍 스치는 밤하늘도 이러하였으리
새 달력을 걸고 헌 달력을 내리니
손가락이 벨만큼 빳빳했던 달력이 어느새 누글누글하다
부드러운 지도다
하루하루 빠짐없이 살아낸 날짜들 덕분이다
하루하루 어금니 꽉 물고 살아낸 사람들,
세파(世波)로 그린 지도
달력의 날짜들도 손에서 손으로
달동네 연탄 나르듯, 다음, 다음 날짜로 힘을 실어주느라
그저 숫자만이 아니었던, 그 빛나는 자리

날짜들 사이로 셀렘과 다짐의 약속들이 보이고
가족을 이룬 배란의 흔적들이며
찬물 한그릇 떠놓고 빌 듯이
빚 갚아 나간 씀씀이가 보인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옛날에
철지난 달력으로 갓 나온 교과서를 싸주어야만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었던 가난의 골목들이 보이고
비행기, 배, 모자가 되었다가
야구공을 받는 장갑도 되었던 갸륵한 인생사가 보인다
그러니 동네 한약방이나 농협에서 주던 일력
바람 같은 하루하루가 넘긴 낱장을 뜯어
똥 닦던 일은 말해 무엇하리
부드러운 지도 너머로 시작되는 날의 헛헛함도
저 날짜들과 함께 가니 얼마나 든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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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시인

전남 벌교에서 태어나 청주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199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충북작가회의와 시를 배달하는 사람들 ‘엽서시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그리고 참도깨비어린이도서관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며 지내고 있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눈처럼>과 산문집 <요놈이 커서 무엇이 될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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