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학자였고, 언론인이었으며 독립운동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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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학자였고, 언론인이었으며 독립운동가였다”
  • 충청리뷰
  • 승인 2003.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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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와 함께 하는 역사기행 (26) -단재 신채호 사당

‘단재’호 정몽주의 ‘단심갗에서 따와…조국을 위해 ‘일편단심’실천
 
어느 시대이건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바친 인물이 있었다. 특히 우리고장 충북은 외세 침략에 맞서 결연한 의지로 강건한 삶을 산 선각자들이 적지 않았던 곳이다. 그 선각자들 중 한 분이 바로 단재 신채호 선생이다.

단재 신채호는 1880년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지금의 대전시 중구 어남동)에서 내어났지만 일곱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로 옮겨 왔다. 어려서부터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당찬 성격을 보였고,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의 삶에 감동하여 정몽주의 ‘단심갗를 따서 일편단생이라는 호를 지었으나 나중에 단재라고 짧게 바꾸었다고 한다. 따라서 단재라는 호에는 나라를 위한, 자주독립을 위한 일편단심의 뜻이 담겨있다. 훗날 중국 망명길에 올라 온 몸을 던져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여순 감옥에서 그토록 소원하던 독립도 보지 못한 채 순국하던 마지막까지도 단재는 일편단심을 잃지 않았다.

신채호가 칼날 같은 붓을 든 것은 20대 초반이었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서 활동하며 강도 높은 논설들을 내놓았던 단재는 당시의 논설들에서 오직 한 가지만을 강조하였다. “역사는 애국심의 원천이다. 고로 역사의 기록이 강하여야 민족이 강하다.”(대한매일신보논설) 민족 독립의 길을 역사에서 찾았던 것이다.

‘사대주의적 사관에서 쓰여진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고려사를 만 번 읽느니 고구려의 유적지인 집안현을 한 번 돌아보는 것이 낫다’라고 주장한 단재. 그가 망명을 하자마자 맨 처음 한 일은 만주 땅에 묻혀있던 고구려의 유적들을 샅샅이 답사하는 것이었다. 북만주의 흑룡강에서 양자강에 이르는 광활한 만주 벌판에 묻혀진 역사를 찾아냄으로써 우리 역사의 무대를 확장시켜 나갔던 것이다.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이요 문학가요 독립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신채호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과 묘소가 우리 고장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청주에서 고은 삼거리를 지나 미원으로 가다보면 상당산성을 넘어 오는 512번 도로와 만나게 되는데 이 곳이 관정삼거리이다. 관정삼거리에서 미원방면으로 500여 미터만 가면 왼편으로 신채호선생사당을 알리는 푯말이 나온다. 푯말을 따라 몇 번 구비를 돌면 아담한 마을이 나오는데 이 곳이 바로 귀래리 고두미마을이다. 단재 신채호선생이 아주 돌아와 잠든 곳이다.

처음 이 곳을 찾는 이들은 사당을 쉽게 찾지 못하고 길을 헤매기 일쑤다. 청주 중심부에서부터 아니면 고은 삼거리부터라도 ‘단재신채호사당’이라는 푯말이 표시되어 있다면 조금은 쉽게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담한 기념관, 단촐한 사당과 묘소가 신채호선생을 만날 수 있는 전부다. 문득 신채호선생에 대한 대접이 너무 소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단재사당의 바로 앞에 주차장이 있긴 하지만 고두미 마을 어귀에 차를 세우고 한적한 시골길을 걸으며 아이들에게 단재의 어린시절을 이야기해 주는 것도 좋을 듯하다. 지금은 주차장이지만 옛날 단재의 놀이터였을 집터 앞마당. 그 곳에서 어린단재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무엇을 했을까를 상상하며 걷다보면 먼저 단재 기념관이 눈에 들어온다.

유족들과의 의견 차로 오랜 시간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문을 연 기념관이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섰다. 단재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들어선 기념관, 그 안에 단재는 없었다. 말 그대로 기념관이었다. 단지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기념관에서 단재를 만나볼 수는 없었다. 딱딱하고 재미없는 평면적 기념관이 아니라 단재를 좀더 가깝게 느끼고 만나볼 수 있는 입체적 기념관으로 운영할 수는 없는 것인가. 못내 아쉽다.
발길을 옮겨 단재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으로 향한다. 신채호사당은 야트막한 산기슭에 오롯이 서 있다. 사당 안으로 들어서면 단재 신채호선생이 의연한 자태로 우리를 맞는다. 단재 신채호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너무나 잘 알려진 일화지만 단재의 대쪽같은 성품과 의지가 담긴 이야기이기에 이 곳에 오면 내가 아이들에게 꼭 들려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단재선생이 어떤 분이셨냐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로는 세수를 할 때도 절대로 머리를 숙이지 않으셨대. 그래서 세수할 때마다 옷이 다 젖었다는구나.” 그러면 아이들은 묻는다. “왜요?”하고. “왜 그랬을까?” 다시 질문을 던지면 “일본에게 머리를 숙이기 싫어서요”라는 진지한 대답부터 “감옥에 잡혀갈까봐서요”라는 조금은 엉뚱한 대답까지 다양한 답이 나온다. 

 단재 선생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된 아이들에게 평생 곧은 성품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단재선생을 직접 그려보게 하는 것도 좋겠다. 아이들이 본 단재는 어떤 모습일까? 단재의 모습을 직접 그려보며 아이들은 나름대로 나라사랑의 의미를 되새겨보지 않을까.

단재사당 뒤쪽에는 묘소가 있다. 묘소를 둘러본 아이들의 첫 마디는 “무덤이 왜 이렇게 커요?”이다.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이승에서의 삶을 보상이라도 해 주고 싶어서였을까. 높은 봉분이 왠지 좀 어색하다.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의 발끝에 채이지 않게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 달라.”던 선생의 유언에는 나라가 독립되기 전에는 죽어서도 돌아갈 수 없다는 일편단심의 굳은 의지가 담겨있다. 그러나 문중과 지인들의 뜻에 의해 선생의 유해는 한 줌의 재로 이 곳 귀래리에 묻혔다.

역사를 통해서 나라를 구하고 역사를 통해서 자주적인 독립국임을 강조했던 단재 신채호. 단재의 정신을 되새기며 사당을 뒤로한 나에게 단재는 나지막이 속삭인다. “역사만이 살길이다”라고.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통일이라는 과제를 해결해야하는 지금이야말로 올바른 사관과 역사를 바로 보는 시각이 절실히 필요한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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