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KAL기 희생자 유족이라고 밝히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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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KAL기 희생자 유족이라고 밝히지도 못했다”
  • 홍강희 기자
  • 승인 2004.01.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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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살던 사람들이 보상금 받고 팔자고쳤다고 보도돼 억울”
사고현장 가보고 ‘뭔가 잘못됐다’직감,소지품 한개 없어

지난해 뜻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KAL기 사건 진상규명운동이 일어나 ‘충청리뷰’는 KAL 858기 충북 희생자 가족을 접촉하기 위해 노력했다. 연락처를 확인하고 만남을 시도했으나 단 한 명과 선이 닿았고, 다른 두 명은 연락이 되지 않거나 만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 중 김모씨는 자신의 실체를 공개하지 말아달라는 단서조항 아래 당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KAL기 희생자 유가족이라고 떳떳이 밝히지 못하고 살아왔다”고 말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유가족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피해자라는 말 못하고 살았다”

“KAL기 사건이라면 그동안 언론에 너무 당해 말하고 싶지 않다. KAL 858기 사건을 신문과 방송에서는 어떻게 다뤘는가. 정부 발표만 듣고 일방적으로 썼지 유가족들의 이야기는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유가족들이 보상금을 엄청나게 챙긴 사람들로 보도돼 주변에서는 ‘그 만큼 챙겼으면 됐지 뭘 또 바라느냐’는 시선을 보내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피해자 가족들은 이렇게 17년을 살아 왔다.”

김인성(37·가명)씨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가 언론을 기피한 실체는 바로 이 것이었다. KAL기 사건에 대한 정부의 왜곡발표를 그대로 믿는 국민들에게 다시 한 번 왜곡당했다고 생각하는 그는 그 책임이 언론에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김씨는 87년 당시 현대건설에서 근무하던 아버지를 잃었다. 49살의 젊은 건설일꾼이던 아버지는 4년의 이라크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던 중 참변을 당했다. 하지만 김씨 가족들은 피해자이면서도 주변의 시선이 무서워 아무 소리 하지 못하고 살았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20살로 직장생활을 하던 그는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저녁 9시 뉴스를 보는데 사고 소식이 자막으로 나왔다. 설마설마하다가 아버지가 탑승하신 것을 확인하고 다음 날 서울 등촌동 사고대책본부로 찾아갔다. 그러나 소지품이나 옷가지 같은 것을 전혀 찾지 못해 유가족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유품이라도 있어야 무덤을 만들 것 아니냐. 소지품을 달라’는 것과 ‘김현희를 데려와라’ 당시 두 가지를 요구하며 대책본부측과 밀고 당기기를 계속했다.”

방송의 왜곡보도로 큰 상처

유품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 중대한 사실은 지금까지 이 사건에 빼놓을 수 없는 단초를 제공한다. ‘김현희 KAL기사건진상규명시민대책위’에서 이 사건이 조작됐다고 믿는 가장 큰 이유 역시 소지품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씨는 사건 당시에도 이것이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됐다고 말했다. 그 후 뭔가 잘못됐다고 느낀 결정적인 단서를 그는 사고 현장방문길에서 포착한다.

“사고 현장이라고 알려진 안다만해 근처를 유가족들이 비행기를 타고 지나갔는데, 이 곳은 우리나라 다도해처럼 섬이 많은 지역이었다. 그래서 왜 비행기 잔해가 없는가 의구심을 갖게 됐다. 바다도 깨끗해 속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섬지역인데 왜 잔해가 걸리지 않았을까’ ‘바다도 깨끗하네’라며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눈으로 현장을 확인하는 순간 ‘이건 아니다’라는 감이 번쩍 들었다.”

이에 대해 신성국 청원군청소년수련관 안중근학교 신부는 “미얀마 안다만해역은 해양관광지역으로 물이 맑기로 유명하다. 그런데도 비행기 잔해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당시 수사책임자인 정형근(한나라당의원)씨는 안다만해역의 수심이 2000m라고 했으나 벵골만이 2000m이지 안다만해는 200m로 알려졌다”고 거들었다.

당시 현장방문비도 개인이 부담하고 비행기사고 중 최저가에 달하는 보상비를 받았으나, 한 방송에서 ‘못살던 사람들이 보상금을 받고 팔자를 고쳤다’는 식으로 보도해 이만저만 피해를 입은게 아니라고 김씨는 흥분했다. 그래서 김씨의 어머니는 이 때 받은 상처로 KAL기 이야기만 나오면 치를 떤다는 것이다.

“언젠가 진상규명될 것”

김씨는 또 정부가 유가족들을 불러 소복을 입힌 채 반공궐기대회를 ‘뻔뻔스럽게’ 열고, 피해자들은 숨을 죽이고 있는데 김현희가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를 발간해 인기인이 된 사실, 사고대책본부에 진을 쳤던 그 많은 방송차량들이 87년 12월 대통령선거가 끝나자 자취도 없이 사라진 일 등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어느 날 주민등록등본을 떼보고 88년 1월 15일 정부가 공식발표를 한 뒤 일괄적으로 사망신고를 한 사실을 발견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가장 힘든 때는 명절이었다. 묘가 없으니 성묘도 갈 수 없고 간간이 양재동 ‘시민의 숲’에서 열리는 합동추모제에 다녀오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명절 돌아오는 것이 고통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정이 각별해 사고 이후 저혈압과 신경쇠약에 시달려오고 있다.”

앞으로 이 사건의 진상규명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그는 “시기가 문제일 뿐”이라고 말했다. 매주 금요일 한나라당사 앞에서 열리는 집회에도 참여할 것이라는 그는 “전에는 오리무중이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애쓰는 만큼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유가족들의 모임에도 몇 번 참석했으나 충북출신 희생자 유가족들과는 일면식이 없다며 “피해 당사자라는 사실을 알리지 못하는 것 자체가 비극이었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김씨와 그의 가족들이 마음 편히 웃으며 살 수 있는 날이 올 것인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혹시나 하고 기다렸다는 유가족들은 이제 스스로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그 것 만으로도 큰 변화라면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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