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情두고 떠나는 이길, 그리 외롭지만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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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情두고 떠나는 이길, 그리 외롭지만은 않으리"
  • 충청리뷰
  • 승인 2000.04.22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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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투사'의 죽음 박찬우씨

글ㆍ김명기 기자
사진 ㆍ육성준 기자

암과 死鬪끝에 꺼진 불꽃, 세상을 사랑한 한 남자 “운명하는 날끼지 그이는 삶에 대한애착이 강했어요.
‘걱정하지 마, 난 안죽어!' 그래서 아무런 유언도 남기지 못했어요. 그이가 남기지 못한유언, 그래서 대신 그이를 사랑했던 많은 분를께,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께 제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두번째 종양골수 전이로 입원했을 때 의사는 가망없다고 통원치료를 하라고 했지만 우리는 기적을 믿었어요. 우리는 삶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어요.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노력했어요. 죽을 고비를 몇번 넘기면서도 그이가 삶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은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여러분께 인사말조차 남기지 못하고 가셨어요." 눈이, 눈이 너무 시린 것은, 그날의 맑은 햇살과 햇살에 반사되는 흰 콘크리트 바닥 때문 이었으리라. 그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 때문에 눈시울이 붉어졌을 것이리라. 그렇게 믿고 싶다. 가슴 속 깊은 곳으로 부터 울리는 슬픔을 드러내기엔 살아 남은 자들의 부끄러움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청주의료원 영안실에서 그의 발인을 지켜보던 이들은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우리곁을 떠난 박찬우씨를 이야기하려 한다. 3개월전 리뷰매거진에서 암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그를 취재했을때, 그는 매우 당당하게 말했었다. (1월12일 리뷰매거진) "주위에서 저를 바라보고 계시는 많은 분들, 그리고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딸 희수, 가슴에 멍에만 안겨주었던 사랑하는 아내가 저를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까. 살아남을 자신 있습니다.
꼭 살아나겠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쓰려 한다. 그러고 보니 다시 쓴다는 이야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안나푸르나봉에서 한 점 꽃으로 진 여성산악인 지현옥씨를 이야기 하면서 우리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쓰려한다’고 했었다.
단지 ‘그녀’가 ‘그'로 바뀌었을 뿐, 그때의 참담했던 심정, 허탈했던 마음, 깊은 슬픔과 안타까움은 오히려 더욱 가슴을 짓누른다. 그는 이제 서른 고개를 갓 넘어선 서른 하나의 나이이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던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열정과 의지는 너무도 뜨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이 세상을 향해 해야할 일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지현옥씨의 뜻하지 않은 죽음을 이야기 했듯. 이제 박찬우씨의 삶에 대한 조가(弔歌)를 우리는 옷깃 여미는 마음으로 부르려 하고 있다.
박찬우씨는 4월 16일 오전8시50분에 생을 달리했다. 그토록 그가 극복하고자 했던 종격동종양(암)에 허망하게 무너졌다. 차도를 보이던 종양이 급작스럽게 골수로 이식돼 손 쓸 틈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말했었다.
“투병 생활이 끝나면 세상을 위해'의미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그것이 소소한 것일지라도 귀중한 가치가 있는 그런 일 말입니다. " 그는 결국 그가 암이라는 병마를 이겨내고 세상을 향해 펼치고자 했던 의미있는 일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하지못한 채 저쪽 세상으로 갔다.

그가 하고자 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무엇이 급해 이제 갓 17개월 된 딸 희수와, 경제적인 사정으로 결혼식을 치러주지 못해 못내 죄스런 마음을 떨칠수 없었던 아내 이정민씨(30)를 두고 머나먼 그곳으로 떠났을까.
하지만 그는 그리 크게 외롭지는 않으리. 떠나는 길, 이승의 모든 질곡과 상념과 애증을 두고 무념과 무상과 허심의 길로 드는 이 노정(路程)이 그리 외롭지만은 않으리. 아름다웠던 사람, 유난히 정이 많았던 사람.
이제 그 끊기 어려운 정을 두고 북망으로 드는 길에서 그는 외롭지 많은 않으리. 그가 가는 길목, 그가 10년간 다녔던 충북대학교 그 한 켠에 있는 신학생회관에서 18일 오전 10시 그를 위한 노제가 있었다.

그 자리엔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모여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주며 명복을 빌어주고 있었다.
우리는 그를 무엇으로 기억하려 하는가. 우리는 90년과 93년 집시법 위반과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던 민주 투사로 기억할 수 있다. ‘독종’ 소리를 들을 만큼 불의엔 굽힐줄 모르던 강직했던 사람으로 기억할 수 있다.
하면서도 수줍게 웃는 미소가 너무나 맑았던 부드러운 남자로 기억할 수 있다.

충북대총학생회장과 전대협 충북지구 의장을 맡으면서도 청주시 율량동에서 자장면 배달부로 일하며 밑바닥 삶을 함께 나눈 실천적 인물로도 기억할 수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둔 아버지였다. 평범한 그의 삶의 모습이 그가 우리에게 기억되고 싶은 마지막 모습은 아닐까. 하여 평범하지만 너무도 소중한 삶의 편린들을 버릴 수 없어 그는 사투를 벌였고 살아 남으려 했으리라.
아내 정민씨는 노제에서 그를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운명하는 날까지 그이는 삶에 대한 애착이 강했어요. ‘걱정하지 마, 난 안죽어 그래서 아무런 유언도 남기지 못했어요. 그이가 남기지 못한 유언, 그래서 대신 그이를 사랑했던 많은 분들께,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께 제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두번째 종양 골수전이로 입원했을 때 의사는 가망없다고, 통원치료를 하라고 했지만 우리는 기적을 믿었어요. 우리는 삶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어요.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노력했어요. 한달전부터 의사는 징후가 좋지 않다. 며칠 못간다 하더군요. 믿지 않았어요.
총선때까지는 버틴다고 했어요.

선거 끝나면 보고 싶었던 많은 사람들이 문병 올거라면서요. 죽을 고비를 몇번 넘기면서도 그이가 삶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은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여러분께 인사말 조차 남기지 못하고 가셨어요." 그는 사람이 너무도 그리워 보고싶은 사람 '리스트’를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먹어야 산다며, 그래야 그리운 사람들을 볼 수 있다며 구토증을 억누르며 열심히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임종할 땐 자신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어 눈을 감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아내 정민씨는 말한다. “너무 일찍 갔다고 너무 일찍 잊지 말아주세요. 제발 오래오래 기억해 주세요. 여러분을 그리워하던 그이 마음의 반만큼만 비워 주세요. "

민주화 투사로, 불의에 굴하지 않았던 ‘독종'으로, 미소가 해 맑았던 부드러운 남자로, 다정다감했던 한 가장으로 기억하는 그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그는 떠났다. 여름 한철 흐드러지게 피었다 간밤에 소리없이 져버린 모란꽃 처럼 그는 떠났다. 그리고 그를 대전 정수원에 안장한 다음날인 4월19일, 봄가뭄을 끝내는 실비가 소리없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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