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충정 한줌 재로 묻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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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충정 한줌 재로 묻히다
  • 오옥균 기자
  • 승인 2004.06.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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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닮고 싶던 애국청년 고 백귀보(23)씨
미국시민권자임에도 불구, 조국의 해병대 자원 입대

양심적 병역기피 합법성 논란
최근 특정종교의 신자로서 병역 소집을 거부한 혐의(병역법 위반)로 기소된 오모(22)씨에 대해 사법부가 처음으로 무죄판결을 내린 이후 양심적 병역거부의 합법성 인정여부가 우리사회의 주요 논란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이에 앞서 지난 2002년에는 법무부가 미국시민권 취득을 이용한 병역기피 혐의로 가수 유승준씨의 입국을 막았다.

당시 국익에 해가 되는 자의 입국불허조치는 당연하다는 법무부의 입장과 개인의 기본권침해라고 주장하는 유승준을 옹호하는 측의 의견이 대립되면서 사회적 이슈로까지 떠오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소위 지도층이란 사람들의 병역기피 사례들이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국민들은 분노했다.

냉전체제 해체이후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대한민국에서의 병역은 남자라면 누구나 치러야 하는 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통일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대한민국의 남성은 병역의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4대 의무 중 하나인 국방의 의무가 선택적 의무로 변질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일고 있다.

   
▲ 아버지 백대현씨와 아들 백귀보씨가 여행중 찍은 사진(맨 위)과 현충원 안장식(중간), 아들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 육성준 기자
남다른 애국심을 갖고 있는 청년
이러한 때에 최근 입대를 자청해 아깝게도 목숨을 잃은 청년이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다시 한번 병역의 참뜻을 생각하게 한다.

11일 현충원에서는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꼭 해보겠다는 신념에 가득 찼던 23세의 故 백귀보씨의 안장식이 있었다. 귀보씨는 지난 3월23일 포항해병훈련단에 입소해 다음달 2일 폐렴증세를 보이다 4월21일 끝내 눈을 감고 말았다.

故 백귀보씨는 미국시민권을 가지고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건강한 정신을 가진 청년이었다. 로버트 김 사건을 접하며 ‘나도 조국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겠다’고 늘 다짐하던 그를 주위 친구들은 기억한다.

경영학을 전공하던 그의 장래희망이 CIA, FBI 등으로 바뀐 것도 그 무렵이다. 그래서 학업을 중단하고 힘들기로 소문난 조국의 해병대를 자원 입대하게 된 것이다.

“어릴 때부터 또래의 아이들보다 생각이 깊었다.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던 아인데 나는 늘 칭찬보단 꾸지람을 많이 했다”고 아버지 백대현(61)씨는 아들 귀보씨를 회상한다.

귀보씨는 미국에서 태어나 5살이 되던 해 부모님의 고향인 청주로 돌아왔다. 중앙초등학교, 세광중학교, 금천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살릴 수 있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독립심이 강한 아이였다. 국내 최연소로 초경량비행기 조종사 자격을 취득했고, 고등학교 1학년때인 1997년에는 해병대 체험을 하는 해병캠프가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 캠프 1기생으로 4박5일의 훈련과정을 마치고는 그때 받은 수료증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항상 품에 지니고 다녔다”고 백대현씨는 말한다.

가풍이 돼버린 3대에 걸친 조국 사랑
귀보씨의 애국심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할아버지 故 백상기씨는 반공청년단 부단장으로 활동하다 6.25전쟁 당시 경찰로 편입돼 전장에서 아까운 목숨을 잃은 국가유공자다. 또한 그의 아버지 백대현씨는 해병 제2여단에서 해병대 장교로 군복무를 했다. 이러한 가풍속에서 성장한 귀보씨는 그 또래집단에서는 보기 드문 국가관을 가지고 있었다.


어릴 적 귀보씨는 아버지로부터 ‘남자는 가족을 지키고 조국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다. 그는 한국인이지만 미국시민권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원치 않으면 병역을 필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군대는 선택이 아닌 대한민국의 자식으로서 조금도 망설일 수 없는 성스러운 의식이었다. 그는 생전에 ‘군대갈 나이가 되면 꼭 해병대를 지원해 아버지처럼 되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왔다고 한다. 엄했지만 항상 자신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아버지가 그에게는 존경의 대상이었고, 닮아가고 싶은 모델이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당당한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아들의 마음을 알기에 백대현씨는 더욱 가슴이 아프다. “사업차 중국에 있던 중에 병원에서 연락을 받고 황급히 귀국해 아들의 병실에 들어갔다. 가슴에 호스를 꽂고 산소마스크를 뒤집어쓴 아들이 나를 보고 거수경례를 했다”며 그때의 기억에 잠시 말을 잃었다. 사경을 헤매던 아들이 끝까지 자신보다 가족의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게 아버지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백대현씨는 “살아있다면 국가에 도움이 되는 동량으로 성장했을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다. 하지만 내 아들은 누구보다 당당히 살았다”고 말하며 감정을 추스렸다.


또한 세간의 ‘양심적 병역거부 논란’에 대해 “종교적 자유를 외칠 수 있는 것 또한 선대들의 희생으로 일궈낸 조국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현실을 외면한 자기중심적인 위험한 발상이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한편 귀보씨의 발병과정과 치료과정에서 드러난 허술한 관리체계와 의사들의 책임전가식의 진료태도는 안심하고 자식을 군대에 보낼 수 없게 만드는 풍토에 일조하고 있어 개선이 시급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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