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세상에 이런 시인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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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막한 세상에 이런 시인들도 있다
  • 오혜자 객원기자
  • 승인 2014.05.23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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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시’ 100호 발행한 김규성·박원희·배병무·이종수·이원익·이정섭·김덕근 시인
하나 둘 하루의 생업을 마친 시인들이 속속 도착했다. 7명의 시인들이 흥덕문화의 집 사랑방에 둘러앉았다. 작은 케이크가 놓이고 100호를 상징하는 초에 불을 밝혔다. 2006년 1월 16일 이후 매달 독자에게 배달되는 시 ‘엽서시’가 100호를 맞았다.

엽서시는 손바닥 크기의 엽서 10면을 병풍모양으로 엮어 동인들의 창작시를 담아 매월 제작된다. 현재 발행인 이종수 시인과 김규성·박원희·배병무·이원익·이정섭·김덕근 등 7명의 시인이 동인으로 창작에 참여하고 있다.

   

엽서시 동인이 처음 생긴 것은 1989년 8월, 청주 지역의 대학 문학 동아리에 소속된 학생들이 결성하면서부터다. 류정환, 한인수, 나창선, 김기준이 우편엽서 형태에 창작시를 발표하여 전국의 독자들에게 보내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중간 중간 시엽서 발행이 끊기기도 했지만 지속적으로 새로운 동인들이 참여하여 맥을 이었다.

이종수시인은 “1000부 찍어서 800부 발송하고 있다. 전국으로 보낸다. 실시간으로 독자의 반응을 듣고 있다. 직언을 해주시기도 한다. 시를 쓰는 사람들이 독자와 만날 기회를 갖고 소통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쓴 소리도 감사하다”며 시로 독자와 소통하는 것을 강조했다. 시를 배달하려면 비용도 든다. 동인들은 회비와 독자들로부터 받는 구독료 연 1만2000원으로 충당한다.

요즘은 시를 읽는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다. 시집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없다. 시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인터넷을 통해 문학집배원이라는 이름으로 시를 배달해 주기도 하지만 감흥은 적다. 시를 읽지 않는 시대에 엽서시동인들은 가장 아날로그적인 방식을 선택했다.

   
▲ 100호 엽서시 표지
매월 한편씩 시를 쓰고 엽서에 독자의 이름을 적어 우체국에 가서 부쳤다. 독자들은 9년 동안 각종 고지서와 광고물 사이에서 습관처럼 시를 꺼냈다.

현재 엽서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7명의 시인은 모두 삶의 현장이 다르고 시쓰기 방식도 다르다. 박원희 시인은 이번 호에 아내의 암투병을 지킨 지난 겨울을 시로 옮겼다. ‘…아내는 다시 오른다 / 반이 넘게 없어진 가슴을 가지고 / 세상의 모든 공기를 끌어들일 기세로 호흡을 하면서 / 오늘을 살아야 내일이 있는 계단을 오른다’.

음성 한일중학교 국어교사인 이원익 시인은 어느 때 보다도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세월호 아이들을 생각하면 시가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래도 엽서시를 이유 삼아 거리에 나가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추슬러 시를 썼다.” ‘아! 서럽게도 지는 꽃들아! / 너희는 정녕 새 아침으로 살아오지 못하는 것이냐? / 저 수천의 이파리 푸른 싹들로 / 뜨거운 여름으로 다시 오지 못하는 것이냐? / 주인을 잃은 저 운동장이며 교실은 어찌하랴? / 너희가 거닐던 길로 아카시아가 피면 또 어찌하랴? …’. 시에는 아이들을 잃은 슬픔과 아픔을 함께하는 시인의 감성이 그대로 담겨있다. 엽서시동인들 모두 인생의 고비마다 시가 있어 추스를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병무가 돌아왔다”

배병무 시인은 두부장사를 하다가 요즘은 트럭으로 과일장사를 하고 있다. 3년간 시를 쓰지 않았던 배시인은 100호 특집을 맞아 어렵게 시를 실었다. 배시인이 “모든 마음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시가 되지 않는 낙서의 시간이었다. 부끄러웠다. 이종수편집장의 시 독촉에 심장병이 다 걸렸다”며 그간의 어려움을 토로하자 다른 시인들도 “마감 전화를 받지 않으려고 전화기를 꺼놨다”, “압박감에 엽서시는 쳐다보기도 싫을 때도 있다”며 맞장구를 쳤다.

동인들은 배시인이 돌아온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이야기 중에 합창하듯 “병무가 돌아왔다”를 외쳤다. 오래 마음 고생을 하고 있는 동료 시인에 대한 안타까움과 반가움이 동시에 묻어나는 환호였다.

엽서시동인으로 한국작가회의 충북 대전지회 회원들 중 김규성·박원희·배병무·이종수·이원익·이정섭·김덕근 시인이 활동하고 있다. 매월 신작시를 엽서에 담아 전국의 독자에서 배달하고 있다. 엽서시는 추천작가의 그림 서예 사진 등을 함께 싣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시의 예술성과 현장성을 더해 준다는 평을 받아 왔다.

100호의 표지는 태권도차량에 묶인 노란리본을 클로즈업한 사진이다. 초보자가 매는 노란띠가 리본모양으로 질끈 묶여 있다. 시인의 예리한 감각으로 찾아내는 사람 냄새가 더욱 필요한 시기다.

“2014년 5월 엽서시가 조금 늦어졌습니다. 그동안 여러가지 까닭으로 활동을 잠시 쉬었던 배병무 동인까지 합류하여 모든 동인의 작품을 싣느라 늦어졌습니다. 5월 엽서시가 100호여서 조촐한 기념 자리를 갖고 자축하였습니다. 앞으로도 더 나은 시로 찾아뵙겠습니다. 100호가 숫자에 불과하지만 그만큼 책임이 따르는 숫자임을 알기에 더욱 더 열심히 치열하게 시 작업을 하겠습니다. 그동안 한 편 한 편 시를 발표하느라 마음 고생이 많았을 동인 여러분과 실시간으로 좋은 소리, 궂은 소리, 따뜻한 질책으로 엽서시를 아껴주신 독자 여러분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뵙겠습니다.” 엽서시동인으로 편집장을 맡고 있는 이종수 시인이 독자에게 전하는 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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