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부자독립운동공적비’ 한많은 우리 현대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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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부자독립운동공적비’ 한많은 우리 현대사를 말한다
  • 권혁상 기자
  • 승인 2014.08.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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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응·김태규 독립운동가 2대 이어 ‘빨치산 장기수’ 3대 김형식씨 고향 지켜
괴산군 소수면 수리마을 느티나무 아래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독립운동을 기리는 ‘부자독립운동공적비’가 자리잡고 있다. 지난 91년 대한노인회 괴산군지회가 김용응(金鏞應·1870~1945)·김태규(金泰珪·1896~1956) 선생의 독립운동을 선양하기 위해 세운 공적비다. 지난 3월 충주보훈지청은 이 부자공적비를 ‘이달의 현충시설’로 지정하기도 했다.

   
▲ 3대 김형식씨 / 사진제공 뉴시스

아버지 김용응 선생은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활약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위원장에 추천되기도 했으나 병환으로 취임하지 못했다는 것.

   
▲ 1대 김용응 선생과 2대 김태규 선생(왼쪽부터) / 사진제공 뉴시스
아들 김태규 선생은 부친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했다. 국내의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와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해 임시정부에 보내는 역할을 했다. 또한 연병호·안재홍 선생 등과 함께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해 재무부장으로 활약했다. 1920년 대한애국부인회 사건으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정부는 지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치열한 독립운동을 벌인 부자의 삶은 3대로 이어지면서 또한번 굴곡을 겪게 된다. 1대인 김용응 선생은 해방되던 해 숨을 거뒀고 김태규 선생의 차남인 3대 김형식씨(88)가 좌익 전력에 휘말리게 된다.

김씨는 소수면에서 태어나 청주 주성초 - 서울 배재중학교 -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수재였다. 대학에서 좌익사상에 심취해 1949년 자진 월북했다.

   
▲ 괴산군노인회가 세운 ‘부자독립운동공적비’  / 사진제공 뉴시스
김씨는 “이승만 정권의 좌익탄압이 본격화되면서 남쪽에 있으면 우익세력에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주위의 말에 북으로 갔다. 그때 월북한 남로당 간부들과 함께 강동정치학원과 2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해 남으로 내려왔다가 경남 밀양, 울산 등지에서 빨치산으로 남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1952년 군경 토벌대에 검거됐고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조부의 독립운동 공적 덕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이후 20년간 장기수로 복역한 뒤 석방됐고 마침내 1980년대 고향 괴산에 정착했다.

김씨는 출감한뒤 북으로 가지 않고 전향해 대한민국에 남은 이유에 대해 “고향이 여긴데 북에 가서 죽을 순 없지 않느냐. 박헌영도 숙청됐듯이 나 역시 숙청됐을 거다. 지금은 이북보다 대한민국이 더 낫다. 내가 빨치산 활동을 했을 땐 지금의 이북 같은 모습을 원했던 건 아니다”고 말했다.

김씨는 배재중 시절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했고 감옥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는 것. 독학(?)의 솜씨로 지난 1999년, 2002년 두 차례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독립’과 ‘혁명’을 꿈꿔온 3대의 가계사는 한많은 우리 현대사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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