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은 조건 좋은 남자를 왜 거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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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은 조건 좋은 남자를 왜 거부했을까
  • 충북인뉴스
  • 승인 2014.08.27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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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초상> 개인의 선택과 사회적 인습의 길항관계 보여줘
영화를 통해 문학 읽기⑥ 영화 <여인의 초상>

   
윤정용 평론가

헨리 제임스는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생애의 대부분을 유럽, 특히 영국에서 살면서 미국과 유럽, 즉 신세계와 구세계, 그리고 미국인과 유럽인의 특징에 대한 면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심리적 리얼리즘을 추구했다. 마크 트웨인이 미국 문학을 영국 문학으로부터 독립시켜 미국의 고유한 문학전통을 마련했다면, 제임스는 더 나아가 미국문학을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미국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다.

유럽과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제임스는 유럽에서의 미국인의 정체성의 문제와 함께 문화갈등, 외양과 내면 사이의 괴리에 대한 자각, 삶과 예술의 관계를 작품 속에서 구현했다. 그의 ‘의식의 중심’이라는 서사기법은 나중에 모더니즘 소설가들이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발전시켰다.

의식의 흐름 따라 전개

   
▲ 여인의 초상 The Portrait of a Lady , 1996
감독 제인 캠피온
<여인의 초상>은 몇 년 앞서 출간된 <데이지 밀러>에 이어 제임스의 작가적 명성을 떨치게 한 작품으로 여성에 대한 그의 자전적인 경험이 녹아 있다. 독립심 강하고 지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한 미국인 처녀 이사벨 아처는 영국의 부유한 친척으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게 된 후,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에 정착한 미국인 길버트 오스몬드와 결혼하는 잘못을 선택을 한다. 우여곡절 끝에 이사벨은 자신의 이상주의적 포부를 꺾은 채 체념의 삶을 선택한다. 한 마디로 <여인의 초상>은 제임스 문학의 위대함의 표상이다.

<여인의 초상>은 분량도 길고 플롯이 극적이기보다는 주인공 이사벨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기 때문에 따라 읽는 것조차 쉽지 않다. 게다가 ‘연애 소설’의 외피임에도 불구하고 톤은 상당히 무겁고 건조하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여인의 초상>은 개인의 선택과 자유가 사회의 인습과 어떻게 길항하고 동화되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여인의 초상>은 읽고 난 뒤 많은 생각거리를 남긴다. 즉, 이사벨이 여러모로 훌륭한 남편감인 워버튼 경의 청혼을 거절한 이유는 뭘까? 반면 오스몬드와 결혼한 것은 순수하게 자신의 선택의 결과인가? 세상의 관습과 개인의 자유는 어떻게 연관되는가? 무엇보다도 이사벨은 마지막에 왜 로마로 돌아가는가? 그녀는 오스몬드에게 돌아가서 불행한 결혼생활을 지속하려는 것인가? 제목은 작품의 의미에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등등.

특히 작품 후반부 이사벨이 워버튼 경의 청혼을 뿌리치고 오스몬드에게 돌아간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논쟁적이다. 이사벨은 자신의 결혼 생활을 반추하는 과정에서, 성적 이끌림 없이, 즉 육체적인 ‘열정’없이 이상만으로 오스몬드를 택한 것에 대해 후회한다.

그러나 이사벨도 그렇고 작가도 그렇고 이에 대해 분명한 반성적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즉, 제임스는 이사벨의 이상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면서도 그녀의 이상 자체는 철저한 반성의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명확하지 않은 태도를 취한다.

   

영화 <여인의 초상>(1996)은 <피아노>(1993)로 잘 알려진 제인 캠피온이 연출하고 니콜 키드먼, 존 말코비치, 바바라 허쉬 등 당대의 뛰어난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 영화는 <피아노>에서 그랬듯이, 감독 특유의 여성적 섬세함과 밀도 있는 연출이 특히 인상적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나면 굉장히 먹먹하고, 배경음악과 대사와 배우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오랫동안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다.

<여인의 초상>을 비교적 쉽게 따라갈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제안하자면, 원작 소설이 주인공 이사벨의 심리에 천착했던 것과 달리 주변 등장인물에 초점을 맞춰 보는 것이다. 감독은 주인공의 심리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고, 대신 여러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관객들로 하여금 이사벨의 심리를 유추하도록 영화적 설정을 시도하고 있다.

예컨대, 영화는 첫 장면에서 가든 코트를 비롯해 유럽의 문화적 유산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그런 뒤 이사벨을 등장시켜 구대륙과 신대륙간의 묘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이사벨이 사촌 랄프와 그녀의 친구 헨리에타를 만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이사벨을 만나면서 손을 흔드는 헨리에타의 모습은 이사벨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럽지만, 관습에 얽매인 유럽인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중도적인 랄프에게 조차도 이질감을 불러일으킨다. 초반부에서 조성되는 긴장감과 이질감은 좁게는 이사벨에게 닥칠 여러 가지 사건, 넓게는 유럽문화의 미국문화의 ‘문화적 충돌’을 암시한다.

매력적인 마담 ‘멀’

원작 소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인물은 마담 멀이다. 그녀의 뛰어난 피아노 연주 실력, 삶에 대한 깊은 성찰, 다양한 주제에 대한 박식함과 세련된 대화와 매너는 순진한 이사벨을 단숨에 매료시킨다. 마담 멀은 한 때는 큰 꿈을 가졌으나 이제는 남편도 자식도 집도 없이 다른 사람의 돈으로 먹고 사는 유럽 상류 사회의 식객으로 전락했다.

그녀는 자신과 달리 젊음과 미모, 재력까지 지닌 이사벨을 시기하고 오스몬드와 자신의 딸 팬지의 물질적 성공을 위해 순진한 그녀를 이용하고 결국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안긴다.

전술했듯이, 원작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여주인공 이사벨의 뛰어난 심리묘사다. 예를 들면, 원작 소설에서 이사벨은 밤새도록 의식의 탐색을 통해 마담 멀의 실체를 깨닫는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제미니 백작 부인의 입을 통해 간단히 처리된다. 영화의 장르적 한계라고도 볼 수 있지만 영화에서 가장 큰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여인의 초상>이 원작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이사벨의 인식의 변화 과정을 지나칠 정도로 외적인 사건으로 처리한 게 아쉬운 점으로 남지만, 그래도 영화는 제임스의 원작 소설을 보다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방식으로 즐기게 해 줌으로써, 원작 소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줄 뿐만 아니라 시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것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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