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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축성술의 보고, 충주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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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축성술의 보고, 충주산성
  • 충북인뉴스
  • 승인 2005.06.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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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권<3> - 충주시<1>

   
▲ 금봉산이라고도 불리는 남산 정상 표석. 정상에 충주산성이 있다.
충주산성을 가기 위해 남산(일명 금봉산)으로 오르는 길은 남산주공아파트를 출발하여 체육시설을 지나 오르는 코스와 직동에서 창룡사를 거쳐 오르는 코스, 마즈막재 정상에서 새로 조성한 임도를 따라 오르는 코스 등 세 가지가 있다. 금봉산과 계명산 사이로 난 마즈막재를 넘는 길가로는 이국풍으로 지어진 카페와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예전에 종민동 나루에서 내린 죄인들이 마즈막재를 넘어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는 애닯은 눈물고개가 이제는 위락시설들이 들어선 시민들의 여가공간으로 바뀐 셈이었다. 마즈막재 정상을 알리는 석비가 있는 곳에서 우회전을 하여 산정으로 나있는 임도를 기어가듯 돌고돌아 5㎞여를 오른 후에야 새로 복원된 성의 동문 밑에 다다를 수 있었다.

빈 몸으로 오르기에도 힘에 부치는 가파른 비탈에 우람하게 쌓아올린 성벽의 위세에 올려다보기만 해도 기가 질렸다. 사다리를 타고 현문으로 되어있는 성의 동문으로 올라갔다. 충주시 동편으로는 계명산, 남산, 대림산이 시가지를 보호하듯 감싸고 있는데 금봉산이라고도 불리는 남산은 해발 636m로 정상에는 충주산성이 있다. 충주산성은 안림동 56-1, 직동 산 24-1, 목벌동 산 54번지에 걸쳐 있으며 1980년 1월 9일에 지방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었다.

   
▲ 복원된 충주산성의 동문쪽 성벽.

충주산성은 해발 636m의 남산 정상과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쪽은 안림동, 동쪽사면은 목벌동, 동남쪽은 직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충주산성은 금봉산(남산)의 꼭대기 부분에서 동쪽으로 급경사를 이루며 남북 방향으로 발달된 지세에 따라 남북방향으로 길게 쌓았다. 성벽은 돌만을 사용하여 내탁 외협축 방식으로 쌓았으며, 산꼭대기에서부터 느리게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비교적 넓은 면적을 수용하면서 쌓았는데 기울기가 급하며, 서쪽의 성벽만은 정상 바로 아래 부분을 통과하도록 쌓았다.

   
▲ 충주산성 서쪽 성벽
축성방식은 석재를 고루 쌓은 전형적인 옛식으로 보이며, 보은의 삼년산성과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성 둘레는 길이 1,120m, 성벽높이 7∼8m이다. 전체의 성벽 중 중간중간 벽이 무너졌고, 5개소 775m의 성곽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현재 동쪽 성벽 일부가 복원되었다. 성안 넓이는 46,524㎡인 것으로 전설에 의하면 삼한시대 마고선녀가 7일만에 쌓아 만든 성이라 하여 마고성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일설에 의하면 백제 개로왕 21년(475)에 축성하여 적을 방어했다고도 전하는데 이는 개로왕이 북쪽의 안림동에 있는 도읍을 옮기려 했다는 설과 일치하고 있음에 주목되고 있다. 1977년에 일부를 보수하였으며 1986년 충주공업전문대학(현 충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조사되었다.

   
▲ 충주산성의 수구 모양. 위로 갈수록 안쪽으로 내쌓기를 하여 사다리꼴을 이루도록 했다.
계곡이 서로 엇갈리는 능선 꼭대기에 동서남북의 4개의 문을 각각 만들었으며, 성내에는 성벽의 안쪽을 따라 빗물이 낮은 쪽으로 흐르게 하는 배수로가 만들어져 있고, 서쪽 꼭대기에서 동쪽으로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을 처리하기 위하여 동문지 왼쪽 계곡에 수구를 설치하여 성안의 물을 빼내도록 하였다.

수구는 위로 갈수록 안쪽으로 내쌓기를 한 다음, 큰 판돌을 2단 겹쳐 올려 놓아 앞면에서 보면 그 모양이 사다리꼴을 이루도록 하였다. 수구의 앞단에는 넓은 판돌을 성벽의 바깥 끝 선에서 14㎝ 정도 푹 튀어나오게 하여 물이 성벽에 떨어지거나 스며들지 않고 성벽 밖으로 떨어지도록 쌓았다.

출수구를 통하여 안쪽을 들여다 보면 판상석을 깐 바닥이 계단처럼 조금씩 높아지며 천장 또한 같은 방식을 취하여 출수구의 너비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수구를 통하여 적이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성내의 물이 바깥으로 빠지는 순서를 살펴보면 수구 안쪽의 좌우 차단벽→왼쪽차단벽→도수로→입수구→배수로→출수구의 순서로 되어있는데, 이같이 성벽의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계단을 통해 물이 흐르도록 만들어진 고대의 수구로는 보은의 삼년산성·문의의 양성산성·옥천의 성치산성이 이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 충주산성 동문지 발굴 전 모습(성 바깥쪽).
충주산성에는 4개의 문터가 남아 있으며 그 중 동문지는 계곡의 가장 낮은 위치를 성벽이 통과하는 곳에서 약간 비켜진 지점에 있으며 문의 구조가 특수한 현문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현문이란 성벽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높이까지 축조한 다음 개구부를 만들어 통행은 사다리를 이용해야만 한다. 헬기장으로 사용되었던 서문지와 남문지 중간부분 및 서문지와 북문지 사이의 넓은 대지 위에 병영이나 창고 시설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산성의 안팎에서 많은 토기와 기와 조각이 나왔다.

   
▲ 충주산성 북문지에서는 충주시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토기는 주로 신라의 것으로 기와 조각은 평행선 무늬의 수키와와 암키와 조각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생선뼈무늬, 마름모무늬 등의 특수한 무늬가 있는 기와조각도 같이 나왔다. 충주산성은 충주 방어의 중심성으로 서쪽의 대림산성, 북쪽의 탄금대토성, 동쪽의 충주영액과 또 북쪽 저 멀리에 있는 장미산성, 보련산성과 함께 동서남북의 여러 방면의 침입하는 적을 막아내기 위하여 쌓은 일련의 견고한 군사적 방어시설 중의 하나로 남산(해발 636m)의 매우 험하고 가파른 지세를 이용하여 쌓은 요새다.

   
▲ 충주산성 동문지에서 보이는 심항산봉수.
충주는 남한강과 그 지류인 달래강 및 요도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토지가 기름지고 기온이 따뜻해 선사시대부터 취락이 이루어졌고 문명의 기운이 싹텄던 곳이다. 지형은 충주의 남쪽으로는 험하고 가파른 소백산맥이 남서쪽으로 달리고 있고, 북서쪽에 차령산맥이 달려가고 있으나, 이 차령산맥의 쇠잔한 언덕 사이의 북쪽으로 흐르는 남한강을 통하여 서울과 수운이 통하고 있다. 이런 여건으로 충주는 남북간에 문물이 오고가는 통로로서의 요충이며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남산의 오른편에 있는 심항산 정상에는 봉수대 터가 남아있는데 이 봉수는 제천의 오현봉수를 받아 이류면의 마산봉수로 연결하던 봉수다. 

1. 창룡사 :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고려 때 나옹화상과 조선 선조때 서산대사가 중창했다는 사찰로 충주 사람들에게는 ‘남산절’로 불리운다.

2. 계명산 :
충주의 진산으로 해발 775m이며, 원래의 이름은 심항산이다. 이외에도 오동산·동악산·계족산·객망산 등의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 현재의 이름은 여명을 알린다는 뜻으로 1958년에 개칭된 것이다.

3. 개로왕 :
백제의 21대 왕. 비유왕의 장남으로 472년 고구려를 토벌하기 위해 위나라에 원군을 요청했으나 실패하고, 고구려의 밀사 도림의 계책에 말려들어 바둑으로 소일하며 국고를 탕진했다. 475년 도림을 통하여 백제의 허실을 알게된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고 국도 한성(지금의 서울)을 빼앗긴 후 살해당했다.

4. 설화 :
신화·전설들을 줄거리로 하여 구전된 사실과는 좀 먼 옛 이야기.

5. 충주영액 :
충주시 안림동과 종민동 사이에 있으며 마즈막재를 넘어 충주로 넘어오는 적을 막기위해 길목에 설치한 차단성. 성의 규모는 석축으로 720m에 달한다.

6. 충주산성 축성 설화 마귀할미 축성설과 남매축성설  
 충주산성 축성과 관련하여 두 가지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다음과 같다. ①충청북도에서 펴낸 전설지에는 아주 오랜 옛날 금단산 수정봉에 은거하던 마귀할미가 하늘의 계율을 어기고 마구 살상을 하여 천제의 노여움을 사 하천산 누독봉으로 쫓겨나 험한 일을 하게 되었다. 그후 500여 년이 지난 후 마귀할미가 개과천선하는 기미가 보이자 천제께서는 금봉산(현재의 남산)에 들어가 성을 쌓고 살라고 하면서 북두칠성을 따라 7일 이내에 축성토록 했다는 전설이다. ②민간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보면 옛날 옛적 남산에 마귀할미가 아들과 딸을 데리고 살았다. 두 오누이는 힘이 장사여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고 한 나라에 장수가 둘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마귀할미는 두 사람에게 사생결단을 내는 내기를 시켰다. 딸에게는 칠일 이내에 성을 쌓게 하고, 아들에게는 칠일 이내에 나막신을 신고 서울에 가서 과거에 급제하고 돌아오라는 내기를 주었다. 칠일째 되는 날 딸은 성을 다 쌓고 성 머리돌만 올려놓으면 완성이 되는데 서울간 아들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귀할미는 죽게 된 아들을 구하기 위해 꾀를 내어 딸에게 펄펄 끓는 팥죽을 한 동이 가져다주며 “네 오라비가 오려면 아직도 멀었으니 이 팥죽을 먹고 하렴.” 하고 말했다. 딸은 들고 있던 성돌을 내려놓으며 눈물을 흘리며 팥죽을 먹기 시작했다. 딸이 펄펄 끓는 팥죽을 거의 다 먹어갈 무렵 서울로 갔던 아들이 성안으로 들어서자 내기는 아들의 승리로 끝났다. 아들을 살려야겠다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딸은 펄펄 끓는 팥죽을 먹으며 내기에 져주고 죽음을 당했다는 전설이다. 이 ‘남매축성 설화’는 전국의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도내에서도 청원군 북일면에 있는 구녀성·보은군 삼년산성 등지에서도 이와 같은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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