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민족작가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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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민족작가대회
  • 충북인뉴스
  • 승인 2005.07.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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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승 환(충북민예총회장, 충북대교수)
   
도종환, 김창규, 김승환 이 세 사람은 2005년 7월 20일(수)부터 25일(월)까지 평양과 백두산 등에서 열리는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휴전선을 넘는다.

남한에서 100명, 북한에서 100명, 해외에서 30여 명 등이 모이는 이번 민족작가대회는 59년 만에 열리는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예술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59년 만의 해후다. 해방공간인 1946년 2월 서울의 종로 YMCA에서 전국문학인대회가 열렸다.

좌우와 지역을 막론하여 명실상부한 국가와 민족의 문학행사였다. 그러니까 이번 민족작가대회는 1946년 서울 대회의 답방인 셈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48년 찬바람 몰아치는 겨울, 벽초 홍명희 선생께서는 김구 김규식 선생 등과 함께 남북제정당연석회의에 참석하러 북행길을 올랐다. 57년 전의 일이다. 남북회담은 결렬되었고 민족은 외세의 침탈을 막아내지 못했다.

분단과 적대감의 긴 고통의 늪으로 들어선 것이다. 따라서 1945년은 해방이 아니라 분단이고 독립이 아니라 반식민이었다. 그 모순 속에서 수백만이 죽고 고문과 고통을 당해야 했다. 민족문제를 민족의 힘으로 풀지 못한 결과였다.

분단의 그 시절은 정지용의 <유리창>을 마음대로 읽을 수 없었고 이기영의 <고향>은 금서가 되었으며 홍명희의 <임꺽정>은 불온서적이었던 고난의 역사였다. 시대의 격랑이라는 이름의 비행기를 타고 오르는 평양행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그 동안 진보적 예술가들은 민주주의, 민중, 민족, 반외세, 자유, 표현미학 등을 추구했다는 이유만으로 수구보수주의자들로부터 <저런 놈들은 북한으로 보내라>라는 욕설을 무수히 들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수구보수주의자들에게 쫓겨서 북한에 가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희망을 안고 당당히 가는 북행이다. 무엇보다도 신라중심주의가 아닌 민족중심주의를 만들고자 새로운 통일시대를 위하여 미미한 노력의 한 줌을 보태려는 것이다.

이 시대 우리의 비원(悲願)은 통일이다. 평양 민족작가대회는 서로를 이해하고 상생하자는 대전제로 기획되었다. 그 과정을 거쳐서 민족은 하나가 되는 것이고 함께 사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그런데 통일이 쉽게 되는 것은 아니다. 주변 강대국들의 내심 반대도 해결해야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남한 사람들이 가진 북한에 대한 적대감 해소다. 마음속에 철조망을 꽁꽁 쳐두고 있는 상황에서 휴전선의 철조망만 걷어낸다고 통일이 되겠는가?

따라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민족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복무(服務)를 해야 한다. 자기 자신, 자기 가족만을 위하거나 자신만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소시민적 우둔함이다. 더 큰 자기, 더 깊은 자아를 보아야 한다. 현실에서 짧게 사는 것보다 영원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민족이라는 더 큰 존재, 사회라는 더 큰 조직, 역사라는 더 강한 힘에 의해서 결정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타자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주체인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타자는 북한이다. 자기만 고집하지 말고 타자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고 상생(相生)이다.

사천년 민족의 생존은 이제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분단시대에서 통일시대로의 전환이다. 2000년 6·15 공동선언으로 이미 통일시대가 도래했지만, 여전히 분단, 반통일, 외세의존, 남한중심주의, 수구주의가 강력하다.

남한만 잘 살면 된다는 분단이기주의와 타자를 무조건 적대적으로 대하는 극단적 수구주의가 여전히 강성하다. 북한에 전기를 보내는 일도, 아사(餓死) 직전의 어린이에게 식량을 주는 일도 그들의 눈에는 전쟁준비로 보이는 것 같다. 어떻게 하나님은 그들에게 측은지심, 자비, 사랑을 가르쳐 주시지 않았을까?

어린 아이가 슬피 우는 것을 보는 인간은 누구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생긴다. 그 정황이 딱하기 때문이다. 이 측은지심은 사랑, 자비라는 다른 말과 상통한다. 지금 북한은 최저생계의 식량이 부족한 형편이다.

작년에 직접 방문한 연변대학교의 교수가 전하기를 김일성 대학의 기숙사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에 무슨 이데올로기가 필요한가? 어려운 사람은 무조건 도와야 한다. 이런 사실을 듣고서도 측은지심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큰 문제다. 약자를 돕는 것이 정의다. 수구보수주의자들에게 간절히 청하건대 마음의 문을 여시라.

이번 남북 민족작가대회는 문학사적으로는 물론이고 문화사 나아가 민족사에도 의미를 지니고 있다. 원래 문학은 다른 예술 장르와 달라서 민족문제에 직접 개입한다.
문학의 매체인 언어는 문학만을 위한 도구가 아닐뿐더러 언어 자체의 역사성과 이념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문학에서 상호이해가 되면 다른 장르나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이번 민족작가대회는 그런 의미가 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 돋보이는 예술사의 큰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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