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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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많았습니다”
  • 김영회 고문
  • 승인 2005.12.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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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에 엊그제 눈 덮인 상당산성엘 올랐습니다. 영하 10도의 추위에도 겨울산행을 즐기는 등산객들이 줄지어 능선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중세의 수도승처럼 미동도 않고 비탈에 서있는 나무들 사이로 추위도 잊은 산새들이 지저귀며 숲 속의 정적을 깨고 있었습니다.

차가운 날씨였지만 맑은 공기는 오히려 일상에 찌든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었고 발자국을 뗄 때마다 들리는 눈 밟히는 뽀드득 소리는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 주었습니다.

멀리 넓게 펼쳐진 오창 벌이 눈에 들어왔고 가까이 청주시가지가 손에 잡힐 듯 내려다 보였습니다. 해발 490미터의 정상에서 바라보이는 도시의 빌딩들, 아파트 숲은 소인국(小人國)의 그것처럼 개미집을 연상하게 했습니다.

햇살이 눈부신 먼 하늘을 바라보자니 갑자기 지나온 한 해가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순간 가벼운 전율이 온몸을 감싸왔습니다. “아하, 올해도 참으로 많은 말을 했구나”하는 후회였습니다. “말을 줄여야지”하고 그때마다 다짐을 하곤 했지만 공·사석을 불문하고 무슨 말이 그렇게도 필요했는지 쉬지 않고 많은 말을 했습니다.

때로는 옳은 말이랍시고 시비를 가리는데 먼저 나섰고 때로는 의견이 다른 상대에게 내 생각이 옳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적도 많았습니다. 일방적으로 내 주장만을 내 세우며 장광설을 늘어놓은 적도 다반사(茶飯事)였습니다.

글이라고 쓴답시고 혼자 세상을 떠 안은 듯이 어줍잖은 논리를 펴기 일쑤였고 세상사 옳고 그름을 혼자 재판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까운 사람과도 입씨름을 벌일 수밖에 없었고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과 낯을 붉힌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옳았던 것인지. 옳은 것은 무엇이고 그른 것은 무엇인지. 아니, 옳다고 주장한 그것들은 과연 옳은 것이었는지. 그것이 옳은 것이었다면 그 옳은 것은 누가 옳은 것이라고 규정해 놓은 것인지. 꼬리를 무는 상념은 자괴감(自愧感)이 되어 가슴을 짓눌러 왔습니다.

도대체 이 아집과 독선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부끄러움으로 추위에 언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내 잘못은 잊고 남을 원망하고 남을 탓한 것은 그 얼마였습니까. 남의 의견은 도외시하고 내 생각에 동의할 것을 강요 한 것은 그 얼마였습니까.

남을 비판하고 비난한 것은 또 얼마였습니까. 남을 칭찬하기보다 폄훼(貶毁)한 것은 또 얼마였습니까. 부질없는 말 몇 마디로 남의 가슴에 상처를 준 것은 또 얼마였습니까. 대체 이 못된 버릇은 어디서 배운 것입니까.

불가(佛家)에서는 ‘입은 화(禍)를 부르는 문’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고승대덕(高僧大德)은 사람이 짓는 업(業)중에서 입으로 짓는 업이 가장 무섭다하여 구업(口業)을 경계하라 이릅니다.

하지만 경박한 천품(天稟)에 수양마저 부족한 범인(凡人)으로서 그것은 언제나 공념불(空念佛)에 불과 할 뿐입니다.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실망만이 쌓일 뿐입니다.

다사다난했던 2005, 한 해가 가고 다시 한 해가 밝아 옵니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고려말의 국사(國師) 나옹스님의 시를 다시 읽습니다.

-허공은 날더러 티없이 살라하고 / 청산은 날더러 말없이 살라하네 / 욕심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 바람처럼 물처럼 살다가라 하네-

한해동안 졸문을 읽어주신 독자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십시요.
/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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