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세 남해원 옹, 매년 고철모아 장학금 선행하는 이유
상태바
96세 남해원 옹, 매년 고철모아 장학금 선행하는 이유
  • 김천수 기자
  • 승인 2020.01.02 11: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살 때부터 남의집살이…무학자, 농삿일로 부농 일궈
남해원 옹_가족사진 앞에서
남해원 옹_가족사진 앞에서

 

스물다섯 마지기 벼농사와 700평의 밭농사를 밤낮없이 짓는 한 촌로의 농부가 있다. 충북 음성군 금왕읍 도청리에 사는 남해원 옹은 어림짐작 일흔 나이 쯤으로 보인다. 허리가 꼿꼿하고 미소를 머금은 작은 체구의 건강한 촌부다. 부지런하여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밥 때를 제외하곤 늘 논밭에 나가 있다고 한다.

그는 12년 전부터 농한기 겨울철이면 주변의 고철을 모아 팔아 지역에 장학금으로 기탁한다. 자신의 오토바이로 고철을 실어 마당 한 편에 쌓았다가 고물상을 불러들여서 판다. 그 돈에다 농삿 돈을 보태 매년 장학금을 기부하는 것이다.

2008년 100만원을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11년 째 금왕장학회에 기부한 총 장학금액은 3300만원에 달한다. 2월이 되면 쌓인 고물을 또 팔아 기부할 예정이다.

이 밖에도 인근 초등학교에 매년 100만원, 서울의 한 고교에도 150만원씩 장학금을 기탁하고 있다고 남 옹의 딸이 귀띔했다. 대략 기부금액은 총 6000만원 가량으로 집계되지만 기록도 않고 알려지는 것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가 장학금 기부에 뜻을 두게 된 연유가 무엇인지 만나 물어봤다. 그런데 아뿔싸! 그의 노동 경력이 90년이란다. 그렇다면 80 중반의 나이에 들어서 장학금 기부의 뜻을 품고 그 길을 처음 나섰다는 이야기다.

그는 1924년생으로 새해들어 97세가 됐다. 100수를 앞두고 37명의 자손을 거느리고 있다. 그런데도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고 허리도 곧다. 귀가 좀 안들려 보청기를 했을 뿐 삼시세끼 모두 잘 먹는다.

노익장을 과시하며 선행을 베푸는 그에게 고철을 모으게 된 이유부터 듣고 싶었지만 남 옹의 이야기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배운 한 풀기위해 기탁
특유의 눈웃음을 가진 그가 말했다. “쇠풀을 베어 올 수 있을 때부터니까 일곱 살 쯤부터 남의 집 일을 했던거 같어. 3살 때 어머니까지 잃고 남의 집을 전전하며 목숨을 부지했다네. 오로지 일 밖에 모르고 살아왔어”

그의 삶은 자체가 노동이다. 3세 때부터 남의 손에 맡겨지며 얹혀 자라던 그는 소꼴을 벨 수 있는 7세가량부터 본격적인 남의집살이를 했다고 한다. 22세 때는 일제 강제징용에 동원돼 홋카이도 비행장에서 13개월 동안 노동에 시달리다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그는 야학으로 국문을 뚫었다고 말한다.

돌아가신 고모 아주머니와 마을 사람들한테서 전해들은 얘기지만 그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그는 “(아버지가) 음성 교회에서 종리원을 했었대. 독립자금을 모아서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주다가 왜놈들한테 발각돼 감옥가서 매를 엄청 맞으셨다네. 나와서 그 길로 돌아가시게 됐대”라며 벽에 걸린 부친의 사진을 바라봤다.

남 옹의 부친 남석현은 아마도 천도교 종리원을 지내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일을 하다가 고초를 겪고 생을 마감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해에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서 그는 세 살에 고아가 됐다. 찢어지게 가난함 속에 열두 살 터울의 큰 형과 두 누이도 각자 뿔뿔이 흩어져 간신히 입에 풀칠하며 연명했다는 말에서 고단한 선조들의 삶이 모두 그랬을 것 같은 마음마저 들었다.

음성 금왕읍 기부천사 남해원어르신 고물팔아 11년째 장학금 기탁
음성 금왕읍 기부천사 남해원어르신 고물팔아 11년째 장학금 기탁

 

처음에 장호원 쪽에 보내졌다가 금왕 내송리로 돌아왔고 다시 인근의 도청리에서 남의 집 농삿일로 유년의 삶이 시작됐다. 그는 살기 위해 아니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일을 해 끼니를 때우고 품삯을 모았다고 한다. 징용에서 돌아온 뒤 스물여섯 되던 해에 장가를 들고 지금 사는 집터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신혼임에도 4년 넘게 남의집살이를 했고 서른둘에 인삼농사를 시작했다. 금왕 관내에서 두 번 째로 시작한 인삼농사였다.

그 것을 지금 두 아들이 이어받아 짓고 있고, 인삼 부농이 됐다. 큰 아들은 공부를 해서 박사 교수가 됐다.

남 옹은 “많은 자식 다 공부시키려면 전답을 팔아야 할 텐데 그럴 수가 없었어. 애들한테 사정을 얘기하고 인삼농사를 같이 짓자고 했더니 고맙게도 모두 순종하는거야”라며 당시를 떠올리며 고마워했다. 지금이야 전국을 다니며 인삼농을 하는 대농이 됐으니 오히려 두 아들이 고마워하고 있다고 한다. 손자들도 대를 이어 인삼농사를 함께 짓고 있다고 한다.

천수경 등 독송도 경지에
인터뷰하는 동안 옆에 있던 막내딸이 “저는 그래도 대학을 다녔어요. 오빠들이 너는 다녀야 한다고 해서 다니게 된거죠”라며 웃었다. 이 막내딸은 청주에 살면서 아픈 어머니를 모시면서도 도청리 집을 자주 찾아 아버지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효녀다.

어떻게 해서 고물을 모아 장학금을 주기 시작한 것인지 다시 물었다. 지긋이 웃음을 지으며 남 옹은 “이제는 니들이 농사 다 알아서 짓고 나는 뒤로 물러나도 될 터이고...”라며 잠시 쉬었다. 이어 “내가 어렵게 사는 바람에 무학이라 한이 많아 그런 애들을 위해서 나설 마음을 먹게 된거야.”라고 말했다. 이제야 남 옹의 진심을 듣게 됐다. 이제는 쉬셔야 한다는 자식들 성화에는 “테레비만 보면 못써 육신을 움직여야지”라며 자동처럼 응답했다.

이제 반야심경, 천수경 등 불교경전 독송에 능하다는 소문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쉰일곱부터 절에 다니다가 경전을 읽고 부르게 됐지”라고 말했다.

막내딸이 “아버지가 흥이 많으시고 구성지게 잘하세요”라며 독송을 신청하고픈 기자의 마음을 더 들뜨게 했다. 천수경을 청하자 지체 없이 남 옹은 미소를 머금은 채 바람 등을 탄 듯 두 눈을 감았다 떴다하며 심오함 속에 흥이 섞인 독송을 이어갔다.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수리수리 마하수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