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의 미술세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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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의 미술세계 3
  • 이상기 중심고을연구원장, 문학박사
  • 승인 2024.04.12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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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오르막길, 건강은 내리막길

1971년에는 1월 27일 뉴욕 Poindexter(포인덱스터) 화랑에서 김환기의 그림(點畵)를 보러 온다. 3월 12일에는 전화가 와서 9월 25일부터 10월 21일까지 4주 동안 제1회 점화 전시회를 열기로 했다고 통보한다.

갤러리와 전시 일정이 결정되자 김환기는 작품 제작에 더 몰두한다. 6월 8일에는 전시 포스터를 확정한다. 7월 9일에는 《Art News》 Lawrence Campbell 기자와 인터뷰한다. 9월 25일에는 전시 개막식이 열린다. 10월 1일자 타임지 토요판에 짤막하지만 작품을 격찬하는 평론이 실린다.

뉴욕 포인덱스터 화랑 점화 전시회 개최

이후 Poindexter 화랑에서는 매년 김환기 전시회를 열어 준다. 1972년에도 김환기는 전시회를 위해 끊임없이 점화 작업을 하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 점화에 대해 이제는 화제(畫題)를 붙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점화의 화제는 대부분 무제(無題: Untitled)다. “화제란 보는 사람이 붙이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9월 14일에는 전시 포스터가 완성되어, 일부를 서울 도쿄 파리에 발송한다. 그리고 9월 26일 제2회 개인전이 열린다.

김환기의 70년대 점화
김환기의 70년대 점화

1973년에도 점화작업은 계속된다. 홍점, 흑점, 청점을 시도해 본다. 음력 2월 19일(양력 3월 23일)은 김환기의 환갑이다. 어린 시절 먹던 쑥떡이 생각난다. 3월 28일에는 《타임(Time)》지에 실린 마티스(Henri Matisse) 기사에 놀란다. 미의 최고봉, 심오한 정신, 그것이 마티스의 예술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

4월 8일에는 피카소(Pablo Picasso)가 91세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태양을 가지고 가버린 것 같아서 멍해진다. 세상이 적막해서 살맛이 없어진다. 심심해서 어찌 살꼬.” 위대한 작가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의 명복을 빈다.

9월 15일에는 Poindexter 화랑에서 연락이 와 10월 30일부터 11월 24일까지 제3회 개인전을 열기로 한다. 김환기는 죽을 힘을 다해 작품을 완성한다. 10월 8일에는 미학(美學)을 일기에 표현한다.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란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 보다.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김환기는 점을 통해 개념 이전의 세계 즉 존재를 표현한다. 그러나 작품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그의 건강은 점점 나빠진다. 기운을 못 차려 쓰러질 것 같은 지경에 이른다. 10월 19일 포인덱스터에 나가 포스터를 점검한다. 10월 30일 Poindexter 화랑에서 세 번째 개인전이 열린다.

김환기의 70년대 점화
김환기의 70년대 점화

삶과 예술의 마지막 여정

1974년 1월에는 좀 더 홀가분한 마음에서 여행을 다니며 자연을 즐긴다. 1월 11일에는 펜실베니아주로 여행하다 속도위반으로 벌금 15불(dollar)을 문 이야기도 적고 있다. 1월 20일은 아내 김향안의 58회 생일이다. 생일기념으로 목걸이를 사준다.

김환기는 소로(Henry D. Thoreau) 같은 자연친화적인 삶을 좋아했던 것 같다. 2월 7일자 일기에 그의 “Low living and high thinking(삶은 소박하게 생각은 고상하게)”라고 써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 2월 13일 일기에 솔제니친이 스위스로 추방된 소식을 적어 놓았다. 그러면서 “소련의 관대성을 느끼다. 조국(예술)이냐 예술이냐, 생각해도 모르겠다.”고 기록했다..

김환기는 3월 12일 이생에서의 마지막 생일을 지낸다. 아내 김향안이 생선회에 고기국 그리고 브로콜리 나물을 차려줘 잘 먹는다. 3월 15일에는 Central Park로 나가다 쓰러질 뻔 한다. 숨을 헐떡이기까지 한다. 봄이 되자 자연으로 나가 산책을 하며 건강을 회복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도 밤늦도록 점화 작업을 한다. 5월 들어서는 하반신 신경통 때문에 걸상에 앉아 작업을 해야 할 정도다.

김환기(뉴욕, 1971)
김환기(뉴욕, 1971)

6월 16일 김환기는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언급한다. “새벽부터 비가 왔나 보다. 죽을 날도 가까워 왔는데 무슨 생각을 해야 되나. 꿈은 무한하고 세월은 모자라고.” 6월 28일 신경과에서 진찰을 받고 의사로부터 입원해 수술하자는 말을 듣는다. 밤 12시에 집으로 돌아와 “미학도 철학도 문학도 아니다. 그저 그림일 뿐이다.”는 글을 남긴다. 7월 6일 저녁 점화 #338을 끝낸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말았다.

김환기는 7월 7일 Port Chester 유나이티드 병원에 입원한다. 7월 9일 X-Ray를 찍고 늑골 척수에 온갖 검사를 한다. 수술하기 전 마지막으로 담배를 실컷 피운다. 7월 11일 의사와 상담하고, 지인들이 방문한다. 김환기는 어려운 수술인 걸 알고 마음을 다잡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구구삼정(鳩鳩森亭)에 나오면 하늘도 보고 바람 소리도 듣고 불란서 붉은 술에 태평양 농어(農魚)에 인생을 쉬어가는데 어찌타 사랑이 병이 되어 노래는 못 부르고 쉰 목소리 끝일 줄을 모르는가.”

7월 12일 오후 1시에 수술에 들어간 김환기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글을 남겼다. “해가 환히 든다. 오늘 한 시에 수술. 내 침대엔 Nothing by mouth(금식)가 붙어 있다. 내일이 빨리 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김환기는 수술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7월 25일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의 유해는 뉴욕 발할라(Valhalla) 마을 켄시코(Kensico) 묘지에 묻혔다. 30년 후인 2004년 2월 29일 아내 김향안도 뉴욕에서 세상을 떠나 김환기의 옆에 안장되었다.


 

이상기 :

중심고을연구원장. 문학과 예술을 사랑한다. 독일문학을 전공해 한국외국어대학교 대우교수를 했다. 현재 중심고을연구원장으로 문화재청 지원을 받아 팔봉서원 문화재 활용 사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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