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를 타고 가면 그리움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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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를 타고 가면 그리움과 만난다
  • 충북인뉴스
  • 승인 2004.06.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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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토요일에 지인 아들 결혼식이 있어 상경했습니다. 대전역에서 탑승한 고속열차 KTX는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처럼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열차에 앉아 창 밖을 보노라니 지난 시절 열차와 관련한 추억의 편린들이 기차 레일처럼 다가왔습니다.

유년기 때 저는 시골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울리며 '칙칙폭폭' 달리는 열차만 보면 늘 미지의 세계가 그리웠습니다. 악동들과 어울려 기찻길로 달려가 못 따위를 레일에 올려놓고 기차가 지나가고 나면 쭉 펴지는 못의 변화에 이내 환호성을 지르곤 했습니다.

오래 전에 작고하셨지만 언젠가는 아버님과 열차를 타고 부산을 가게 되었습니다. 폭염을 식히기 위해서 해운대 해수욕장을 가기 위해서였죠.

천안역을 출발한 열차는 대전역에서 잠시 정차했는데 그때 아버님께서는 "얼른 내리라"고 하더니 김이 펄펄 나는 가락국수를 사 주셨습니다. 멸치국물이 시원한 그 가락국수를 한 그릇 후루룩 먹고 다시 열차에 오르니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이런저런 풍광이 역시나 백미였습니다.

대구를 지날 즈음이 되자 아버님께서는 열차 내의 홍익회 직원에게서 삶은 계란과 사이다를 또 사 주셨습니다. 당시 우리 부자가 탑승했던 열차는 지금처럼 속수무책(?)으로 빠른 KTX가 아니라 이 역(驛), 저 역에 모두 서는 이른바 '완행열차'였습니다. 조그만 간이역에 열차가 정차할 때면 왜 그리도 그 간이역의 주변 풍광은 사람 환장하게 멋이 있던지.

가출, 그리고 애인과의 이별

열차는 그처럼 멋과 운치만 있던 것이 아니라 눈물의 곡절도 있었습니다. 일찍이 아내를 잃고 '이가 서 말인' 홀아비로 사셨던 아버님께서는 허구한 날 알콜을 끼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사춘기 때 저는 그처럼 술만 탐하시는 아버님이 미워서 가출을 결행했습니다.

열차를 타고 무작정 상경하여 당시 공원 (工員) 생활을 하던 초등학교 선배를 만났습니다. 그 선배의 배려로 스테인리스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하지만 이틀이 멀다 하고 손가락이 절단되는 실로 열악하고 무시무시한 작업 환경에 넌더리를 내고는 보름만에 집으로 도망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열차는 제게 때로는 가슴 시리는 이별과도 조우하게 했습니다.

지금의 아내와 한창 열애를 하던 20대 초반의 일입니다. 하루는 별 것도 아닌 일로 티격태격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분기탱천한 저는 당시는 '애인'이었던 아내에게 절교를 선언했습니다.

"너처럼 밴댕이 소갈머리인 여자랑은 이젠 끝이야!"

그러자 아내도 용수철처럼 반응했습니다.
"그럼 나도 자기랑은 영영 이별이야!"

하지만 몇 년간이나 연애를 했던 처지였으므로 '그놈의 정 때문에' 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은 해야 했습니다.

천안역에서 대전행 열차표를 끊고 플랫폼까지 따라 나갔습니다. 이윽고 기적을 울리며 열차가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일순 마음이 짠해졌습니다.

'저 열차를 타고 내 애인이 가 버리면 우린 이젠 영영 이별이련가.'

주책없이 눈물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이를 악물며 참았습니다. '남자는 여자 앞에서는 절대 울면 안 된다!'를 읖조리며.

결국 우린 그렇게 이별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애인이 열차를 타고 제 시야에서 사라지자 참았던 눈물이 마구 제 두 볼을 타고 아래로 흘러 내렸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으나 눈을 감아도 그녀는 선연히 떠올랐고,술을 마셔도 그녀의 잔영(殘影)은 여전히 제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보름여 동안이나 실연의 상처에 가슴 아파하다가 더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열차를 타고 애인의 집으로 달려갔지요. 그리고는 애인과 화해의 물꼬를 튼 다음에는 '내친 걸음에' 미래의 장모님께 넙죽 절을 하고는 딸을 달라고 강짜까지 부렸습니다.

이후 결혼을 했지만 애면글면한 삶의 여정은 여전했기에 기실 우리 부부만의 고즈넉한 열차여행은 가뭄에 콩 나듯 했습니다. 그동안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어 늘상 연전연패해, 빈곤의 회전문은 빠져 나오기가 아주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작년에는 경제난의 암운(暗雲)이 더욱 짙어져서 타고 다니던 승용차마저 처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문에 지난 주 토요일에도 지인 아들의 결혼식을 KTX를 타고 참석했던 것입니다. 그 동안 아내와 함께 열차를 이용하여 간 여행이라면 동해안의 정동진역과 부산역, 그리고 대천역 등 고작 한 손으로 꼽을 정도 밖에는 안 됩니다. 여하튼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그처럼 아웅다웅 다투면서도 사랑하며 살았던 아내와의 사이에서 난 자식이 벌써 군인과 고3 딸로 변모했습니다.

작년에 입대한 아들은 내년 가을이나 되어야 전역합니다. 딸은 대입 수험생인지라 일각이 여삼추로 바쁘지요. 그렇지만 내년 가을이 되면 아들은 만기전역을 하여 다시금 대학 복학생이 될 터이고 딸도 발랄한 여대생으로 그 위상(?)이 바뀌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가 되면 두 녀석들도 데리고 멀리멀리 열차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여행 특히나 열차여행은 추억으로 가는 지름길이자, 일상에서의 매너리즘과 번뇌까지도 일거에 희석시켜주는 세상에서 몇 안 되는 카타르시스니까요.

지금은 안 계시지만 아버님이 계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다가옵니다. 그랬더라면 이젠 나라까지 지키는 듬직한 손자와 늘상 전교 1등을 달리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녀의 효도와 응석을 받으시면서 그 얼마나 행복해 하셨을까요! 달리는 열차의 레일 끝에 아버님이 기다리고 계신다면 지금이라도 당장에 열차에 오르고만 싶습니다. 더군다나 그 열차가 천리마처럼 빠른 KTX라면 그 만남의 속도는 또한 얼마나 빠를까 싶습니다. /오마이뉴스

/홍경석 기자 (hks007@hanm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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