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인심 좋았으나 이젠 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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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인심 좋았으나 이젠 야박”
  • 홍강희 기자
  • 승인 2018.05.04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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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이후 북쪽에서 내려온 피란민들 정착 시작
주거환경개선사업-벽화-드라마 촬영으로 ‘상전벽해’
피란민들이 모여살고 한 때 달동네로 불렸던 청주 수암골의 옛 모습. 사진/육성준 기자

어쩌다 이지경 ‘청주 수암골’
과거의 모습은?

수암골은 청주시 수동과 우암동에 걸쳐있는 동네다. 첫 글자를 따서 수암골이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한동안은 달동네로 불렸다. 소박하고 조용했던 동네는 벽화마을로 소문이 나더니 이후 드라마 ‘카인과 아벨’ ‘제빵왕 김탁구’ 등의 촬영지가 되면서 갑자기 관광지가 됐다. 이후 카페, 레스토랑, 음식점 등이 물밀듯이 들어섰고 얼마안가 불야성을 이루는 마을이 됐다. 이 곳은 자고 나면 카페와 음식점이 한 개씩 생겨 이젠 포화상태가 됐다. 골목에는 아직 벽화가 있고, 몇 몇 조형물들은 드라마를 찍었던 장소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수암골은 난개발, 불야성, 카페촌으로 상징되지만 출발은 피란민촌 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서 피란 온 사람들이 눌러 앉아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됐다. 진입도로나 소방도로, 하수도시설 등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달동네로 불렸다. 김종수 수암골 노인회장은 “나는 1972년에 이 곳으로 이사왔다. 한국전쟁 이후에 이북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다 2005년 들어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실시돼 현재의 국수집 ‘영광이네’ 앞으로 큰 도로가 났다. 수암골은 이 도로를 경계로 나뉜다. 벽화마을과 카페촌은 도로 위 동네이고 아래는 예전 그대로 조용하다”고 말했다.

또 양윤식 통우회장은 “이북에서 온 사람이 현재는 3명 밖에 남지 않았다. 거의 세상을 떠났다. 지금 주민들 중에는 80대가 가장 많다. 도로를 내면서 집이 많이 헐렸다. 전에는 도로와 골목까지 집이 꽉 들어차 있었다”고 했다. 과거 도로 위 쪽으로는 100가구가 살았으나 현재는 많이 떠나고 60가구 정도가 남았다고 한다. 흙길이었던 곳에는 보도블럭이 깔렸고, 리어카가 간신히 다니던 골목길은 넓어졌다. 연탄을 때던 집은 보일러로 바뀌고 집들도 개조하거나 다시 지어 깨끗해졌다.

이들은 “전에는 인심이 좋아 대문을 열어놓고 살았다. 비가 오면 남의 집 빨래를 걷어주고 서로 상부상조했다. 달동네라고는 했으나 곁에 우암산이 있어 공기도 맑고 살기 좋았다. 그러나 관광지가 된 뒤로 외지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인심이 야박해졌다”고 입을 모았다. 생활은 훨씬 편리해지고 집도 깨끗해졌으나 인정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한 주민은 “자기 집을 가진 사람들 중 일부는 관광지가 된 후로 집 값이 올랐다고 좋아하고, 일부는 동네가 시끄럽고 번잡해 졌다며 싫어한다”고 전했다.

수암골이 유명해진 뒤 집 값이 오르자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다.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이 일어난 것. 이 단어는 구도심이 번성해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몰리는 과정에서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까지 지칭한다. 과거 조용한 한옥마을이었던 경복궁 인근의 삼청동·북촌·서촌은 2010년 이후 젊은 예술가들의 활동지로 주목받으며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현재 수암골은 평일 평균 200~300명, 주말 600~700명이 찾는 관광지가 됐다. 주민들은 이 곳에 들어선 카페나 식당 등과 거의 교류가 없다고 한다. 벽화가 있는 쪽에는 마을주민들이 여전히 살고 있으나 카페거리에는 외지인들이 터를 잡았다. 그러다보니 주민과 상인들 간에는 큰 거리감이 존재하고 있다. 주민들이 참여하는 것은 관광안내소와 주차장, 화장실 운영 밖에 없다고 한다. 김종수 노인회장은 “일당 2~3만원 받고 위 시설 운영에 관여한다. 그것도 6명 밖에 안된다. 노인층이 많아 할 만한 사람도 드물다”며 “CCTV와 주민 주차장, 장애인 주차장 설치를 청주시에 요구했으나 아직 안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곳은 일반주거지역이라 제재조치를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 이 때문에 난개발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청주시는 수암골을 관광지로 소개하면서 결과적으로는 난개발에 눈을 감았다. 피란민촌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했다는 점에서 청주시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부산 감천문화마을 전경.. 원형이 보존돼 있어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사진/육성준 기자

비교된다, 부산 감천문화마을
같은 피란민촌이지만 원형 살리고 상업시설 경계

 

우리나라에는 3대 벽화마을이 있다. 통영의 동피랑, 부산의 감천문화마을, 청주의 수암골이다. 2007년에 동피랑마을, 2008년 수암골, 2009년에 감천문화마을이 연이어 조성됐다. 그런데 감천문화마을과 동피랑마을은 현재까지 원형이 잘 보존됐으나 수암골은 난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다.

동피랑마을은 통영자원봉사협의회에서 벽화그리기대회를 연 것을 계기로 형성됐다. 수암골은 충북민예총에서 골목골목에 벽화를 그리면서 벽화마을로 발전했다. 한국의 ‘마추픽추’라 불리는 감천문화마을은 유명 관광지가 됐다. 마치 단체사진을 찍듯 마을 전체가 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곳, 질서정연한 계단식 건축기법으로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곳, 몇 십년 전의 모습을 대부분 간직해 또 한 번 놀라게 하는 곳. 여기가 부산 감천마을이다.

이 마을은 한국전쟁 이후 태극도 신앙촌 신도와 피란민들이 모여 살면서 형성됐다. 피란민 중에는 충청도 사람들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과거에는 감천마을이라 불렀으나 이 곳에 문화를 입히고부터는 감천문화마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이 곳은 주민·예술가·관계 전문가·공무원들의 힘으로 탄생했다. 그래서 떠나는 마을에서 돌아오는 마을이 됐고, 빈 집에 문화예술을 담아 공동화지역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감천문화마을 주민협의회는 “4000여명의 태극도 신도들이 반달고개 주변에 집단촌을 만들어 살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지역 예술인들과 주민들이 모여 시작한 마을미술 프로젝트가 마을 모습을 바꿨다. 각종 공모사업을 유치해 2015년에는 140만여명이 방문하는 명소가 됐다”고 밝혔다.

이 마을은 수암골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크지만 문제는 크기가 아니고 원형의 보존 여부다. 감천문화마을은 수암골과 같은 피란민촌인데도 처음부터 상업화를 경계했다. 그래서 지금도 경사진 도로, 좁은 골목, 소박한 집이 그대로 보존돼 있고 군데군데에 작은박물관, 아트숍, 사진갤러리, 하늘마루, 빛의 집, 감내어울터 등이 있다. 카페나 식당 등은 옛 모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주변에 있을 뿐이다. 마을기업사업단, 홍보단, 봉사단, 생활개선사업단, 민박사업단, 문화예술사업단 등을 가동하고 있는 모습도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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