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의 사건‧단체 연관, 독립운동가 36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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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사건‧단체 연관, 독립운동가 36인
  • 김천수 기자
  • 승인 2024.02.29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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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연구소 자료 기반

독립운동에 목숨 바친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아침, 중국 하얼빈 역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켜 그의 숨통을 끊었다. 총격 후 체포될 때 큰 소리로 국제사회를 향해 “코레아후라(大韓萬歲)!!”를 세 번 외쳤다. 이듬해 2월 안 의사는 뤼순(旅順‧여순)에서 거의 매일같이 재판을 받았다. 당시 신문기사에 실린 재판 내용을 한글 필사본으로 제작한 최고(最古)의 <大韓忠義錄(대한충의록)>이란 단행본이 충주 ‘우리한글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2022년 8월 이 자료를 분석해 <안중근 공판기록 한글필사본 ‘大韓忠義錄’의 자료적 성격과 특징>이란 특별한 논문도 발표됐다. 대한충의록은 기사문과 달리 전기소설 형식으로 저격 순간 등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선대들의 목숨 바친 독립운동이 꺼지지 않는 들불처럼 이어져 해방을 이룬 것이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기억은 주요 인물 중심으로 편중돼 온 것이 사실이다. 삼일절 105주년을 맞아 충북의 사건 및 단체와 연관된 독립운동가를 소개한다. 이름 하나 알려지지 않고 독립운동에 목숨까지 바친 선대의 희생을 생각하면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연구소 자료를 토대로 알리고자 한다. 독립운동가별로 자료의 분량 차이가 크지만 대체로 평준화하고 존칭은 선생으로 통일해 싣고자 한다. 한국독립운동 연구소에 담겨진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충북의 사건‧단체 관련 독립운동가가 36명에 국한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밝히며 표와 함께 몇 분을 소개한다.

충북의 사건 및 단체와 연관된 독립운동가 36인.

경석조(慶錫祚) 선생은 혜춘(惠春)이라는 호를 갖고 있다. 1881년 6월 27일 괴산군 연풍면 유하리 출생으로 1957년 4월 4일 사망했다. 1914년 만주에서 광복회 조직, 1919년 대동단 충북 지단 단원으로 활동, 1929년 한족총연합회 중앙 총무부장, 1930년 한국독립당 기밀부장으로 독립운동 전개했다. 건국훈장 애족장과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곽이섭(郭理燮) 선생은 1865년 경북 문경군 가북면 상호리 출신으로 1907년 후반 충북 진천 음성군에서 의병활동을 벌였다. 1907년 음력 10월 하순부터 같은 해 11월 하순경까지 충북 진천·음성 일원에서 총기로 무장하고 10여 명으로 편성된 의병부대를 지휘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됐다.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곽준희(郭俊熙) 선생은 이명으로 곽경희(郭耕熙), 곽준희(郭駿熙)를 사용하기도 했다. 생몰년월일은 1870~1940년 8월 14일이다. 옥천군 이내면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군자금 모집을 담당해 충북과 금산 등지에서도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권기수(權夔洙) 선생은 출생 연도와 출신지 자료가 전해지지 않는다. 1896년 8월 24일 의병의 동정을 정탐하기 위해 국경 지대에서 숨어서 기다리던 조승현 부대에 의해 이범직, 권병선 등 2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체포됐다. 1896년 9월 1일 의연히 사살됐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권덕원(權德元) 선생은 1878년 8월 7일 전북 무주군 경상상곡면 포동동 출신으로 사망일자는 미상이다. 1909년 충북 영동에서 의병활동을 벌였다. 충북 영동군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던 중 체포돼 5년 형을 선고받았다.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권도연(權道淵) 선생은 충북 단양 출신으로 출생 미상이며 1910년 3월 6일 사망했다. 김상태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던 중 1910년 경북 순흥의 단산면 남태동에서 추적하는 일본군과 싸우다가 3월 6일 전사했다.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권영선(權永先) 선생은 충북 청풍 출신으로 출생일은 미상이며 1908년 1월 5일 생을 마감했다. 1908년 청풍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됐다. 동료들과 함께 폭도가 분명하다고 해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서면 운학동에서 총살됐다.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됐다.

권용달(權用達) 선생은 충북 청풍 원서면 덕곡리 출신으로 1907~1908년 청풍·청주·단양에서 의병활동을 펼쳤다. 1907년 10월 단양 출신 의병 이명상 휘하에서 종사를 맡았다. 12월에는 의병부대의 보초감독으로 좌군장을 맡아 활약했다. 2년여 옥고를 겪은 뒤 1910년 출옥했다.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권종필(權鐘弼) 선생은 1885년 6월 16일 제천군 봉양면 삼거리에서 출생해 1965년 1월 15일 별세했다. 1919년 4월 17일 충북 제천군 제천장터 3.1운동 참여해 만세 운동 주도자로 붙잡혀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겪었다.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권중현(權重顯) 선생은 1868년 전북 무주군 북면 내동 출신으로 사망일은 미상이다. 1909년 김흥서 의진에 참여해 충북 영동과 전북 무주에서 의병 활동을 벌였다. 같은 부대원 김천수와 함께 폭도의 죄명으로 징역 4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통령표창에 추서됐다.

김검술(金檢戌) 선생의 생몰은 1858년~1907년 11월 17일로 출신지는 미상이다. 1907년 충북 괴산에서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이지석과 함께 행동한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정부는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명식(金明埴) 선생은 1878년경 충북 영동군 용화면 조동리에서 태어났지만 사망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1909년 충북 영동에서 조석우 의병부대 가담, 군자금과 군사를 모집했다. 내란죄로 2년형을 선고 받았다.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김선일(金善一) 선생의 생몰은 1880~1907년 11월 17일이며 충북 괴산 지역에서 의병항쟁에 참여했다. 정확한 출신지는 알려진 바 없다. 1907년 11월 6일 충주경무서에 체포돼 일본군 수비대에 인도된 후 탈출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다. 11월 17일 수비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용주(金用冑) 선생은 현달(顯達), 김용이(金用伊) 등 이명이 있다. 출생은 미상이며 1896년 4월 생을 마감했다. 1896년 1월 유인석 의진 소속으로 충북 충주성 전투에 참여했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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